제목: 《解密历史:民国十五疑案》
작가:张宏, 张晨怡
출판사:中华书局
발췌번역:
1945년8월15일,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위다푸(郁達夫:욱달부)는 마침내 길고 긴 밤을 건너 승리의 서광을 보았다. 그러나 위다푸가 승리에 대한 흥분으로 들떠있을 때 일본 헌병이 그에게 악의 손길을 뻗쳤다.
1945년8월29일 저녁8시 무렵, 위다푸가 저녁을 먹은 뒤 집에서 세 명의 화교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인도네시아 말을 하는 청년이 와서 위다푸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위다푸는 그 청년을 따라 나간 지 몇 분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손님에게 말했다. “좀 나갔다가 곧 올 테니 잠깐만 앉아계세요.”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잠옷과 나막신차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간 뒤로 위다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실종'됐다. 후에 친구들은 인도네시아 메단의 연합 본부로부터 위다푸가 1945년9월17일 인도네시아 부키팅기에서 일본 헌병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50세였다.
수수께끼 같은 '실종'
항일전 승리 후, 위다푸의 불가사의한 '실종'은 국내외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자료가 많이 없는 까닭으로 오랫동안 문학계의 거장 위다푸의 죽음은 줄곧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다푸가 일본헌병에게 비밀리에 살해됐다고 믿고 있었지만 수마트라에 주둔했던 일본인은 오히려 위다푸가 일본군의 일을 도와주어 인도네시아인의 원한을 사고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다푸를 잔인하게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위다푸의 시신은 도대체 어디에 묻혔을까? 몇 십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다 1985년8월30일, 후위즈(胡愈之)가 위다푸 열사사망40주년 기념좌담회 석상에서 일본의 전범행위를 숨기기 위해 일본헌병이 비밀리에 위다푸를 암살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후위즈는 말했다. “중국현대 첫 일류 시인이자 작가인 위다푸가 실종된 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실종’이란 두 글자는 제가 붙인 것입니다.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된 뒤 위다푸와 우리들은 이름을 숨기고 수마트라로 도망쳤습니다. 그는 원래 귀국할 수도 있었지만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일본말을 한다는 것을 일본헌병에게 발견되어 강제로 7,8개월간 일어통역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들 몰래 인도네시아인과 화교를 도왔습니다. 더욱더 불행한 것은 일본이 항복하기 얼마 전 그가 싱가포르에서 온 항일 지식인이며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헌병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범이란 이름은 반(反)파시즘 전쟁에서 비롯됐습니다. 위다푸는 일본헌병이 그들의 전범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비밀리에 암살한 것입니다.”
같은 해 9월27일, 유명한 현대작가인 위다푸가 일본헌병에게 살해당한 일이 일본 학자인 스즈키 마사오가 수집한 자료로 증명됐다는 신화사의 소식은 위다푸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일본 요코하마시립대학의 스즈키 마사오 부교수가 1966년에 위다푸의 남양 망명생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수많은 자료를 열람한 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등지에서 조사를 하면서 사정을 알고 있는 수백 명의 일본인을 연이어 방문했다. 그러다 얼마 전, 스즈키 마사오의 노력으로 결국 당시 위다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일본 헌병 부대장을 찾게 되었고, 그가 위다푸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위다푸가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했다는 추측이 사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그리고 위메이란(郁美蘭)이 2001년5월16일 <인민일보>해외판에 위다푸가 남양에서 일본인 주위를 맴돌다 결국 반역자에 의해 밀고당해 일본 헌병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실을 상세하게 서술한 글을 올렸다.
글에 따르면, 1944년 일본 헌병 본부가 인도네시아 파야쿰부에서 멀지 않은 부키팅기로 이전하였고 그 지역의 통치력을 대대로 강화했다고 한다. 당시 헌병 본부에는 싱가포르에서 온 선발해온 많은 사람들 중에 싱가포르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일본 파시스트의 훈련을 받았던 홍건페이(洪根培)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역시 헌병부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파야쿰부의 양조장 주인 자오롄(趙廉)이 바로 위다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즉시 고발하지는 않았다. 후에 한 화교 처녀를 마음에 둔 그는 위다푸에게 중매를 부탁했지만 그 처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다 일본 앞잡이와는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처녀의 아버지가 위다푸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위다푸는 기꺼이 주례를 맡아 즉시 그 처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혼례를 올릴 수 있게 하였고 이 일로 홍건페이는 그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 외에도 파야쿰부의 중화학교 교장이 학교 이사회에 의해 해고를 당한 후 위다푸에게 이사회에 말을 좀 해달라고 청했으나 위다푸가 들어주지 않자 그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홍건페이는 헌병에게 위다푸의 진짜 신분을 고발하여 그가 연합군 스파이라고 모함하였고 중화학교 교장이 나와서 증언을 하였다.
홍건페이가 밀고한 사실이 퍼지자 당시 누군가 위다푸에게 다른 곳으로 피신하도록 권했지만 위다푸는 자신이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도망을 친다면 반드시 잡힐 것이라고 생각해 후위즈 등 사람들에게 말했다. “숨지 못할 것입니다. 최근 일본 헌병이 매일 술을 마시러 여기에 옵니다. 이미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죠.(사실 당시 일본 헌병은 위다푸를 감시하면서 그에 대해 조사를 벌여 도쿄, 상하이 등지에서 '자오롄'의 진짜 신분을 조사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먼저 떠나세요. 그렇지 않는다면 일이 크게 될지도 모릅니다.” 후위즈 등 사람들은 위다푸의 분석과 제의가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각자 흩어져 피신했다. 아울러 위다푸와 왕래가 비교적 잦았던 화교 상인이 파야쿰부 부근 십여 명의 화교가 체포당했는데 모두 자오롄과 관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위다푸는 적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를 할 준비를 했고 1945년 음력 5월 초하루에는 유서까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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