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완전한 사랑

simpara 2009. 9. 10. 20:14

1.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덩잉차오(鄧潁超:등영초)

 

 

 개인적인 감정을 국가, 혁명, 정치와 같이 묶였을 때 사랑도 엄숙하게 변할 수 있다. 부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있을 때 이들이 감당하고 치루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의 러브스토리는 “그대의 손을 꼭 잡고 그대와 함께 늙으리다(执子之手,与子偕老)”는 옛 구절로 잘 설명할 수 있다.

1925년 광저우(廣州)에서 결혼하여 1976년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서로의 손을 잡고 반세기를 걸어왔으며, 그 속에서 그들 인생의 시련, 고난, 굴곡, 달콤함 등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 속에 있는 인생의 맛을 진정 이해하고 느낀 사람은 역시 이미 이 세상을 등진 반려자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혁명동지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들 역시 일반 부부와 같은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해당화를 좋아해서 같이 꽃을 가꾸는 것이 취미였다. 한가할 때 이들 부부는 같이 연극을 보거나 산책을 했으며 만날 수 없을 때는 편지로 자주 연락을 했다. 그리고 '샤오차오(小超:덩잉차오를 부르는 애칭)', '라이(來:저우언라이를 부르는 애칭)',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종이가 짧습니다, 당신에게 수없이 많은 키스를 보냅니다” 등 편지에 보이는 애정표현들은 정말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나날 속에서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있어 가장 믿음직스런 조수였고 일상생활에서 그녀는 그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좋은 아내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덩잉차오의 사랑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떤 키 크고 준수한 남자가 저우언라이처럼 한평생 가정에 충실하고 부인과 더불어 일생을 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의 부인은 불임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위급했을 때 부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못한 말들이 너무 많소.”

덩잉차오가 그를 보며 말했다.

“저 역시 당신에게 못한 말들이 많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그저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덩잉차오가 말했다.

“모두 다 가져갈 수밖에 없겠죠!”

저우언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6년 후 덩잉차오는 남편 저우언라이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유골은 그녀의 바람대로 저우언라이의 유골을 안치했던 유골함에 안치됐으며 저우언라이의 유골을 뿌린 같은 장소에 뿌려졌다.

'우리들의 사랑은 깊고도 길며 영원하다'는 덩잉차오의 말을 떠올리면 어느 사이엔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 바진(巴金:파금)과 샤오산(蕭珊:소산)

 

 

 샤오산이라 불리는 한 여자가 병실에서 두 눈을 감았다. 이때부터 바진이라 불리는 한 남자는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해 사랑을 지켰다. 세월이 흘러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지고 맹세를 한 날이 아득해져가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완전히 소유하였다.

“任凭弱水三千,我只取一瓢饮(비유: 많은 여자들이 있어도 한 여자만을 위한다)”는 사랑의 신화를 바진에게서 완벽하게 찾을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바진은 한결같았다.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개인적인 쾌락과 취미 혹은 충동으로 쉽게 사랑하고 쉽게 상대를 바꾸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자신의 책임을 생각할 때 어떻게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샤오산은 원래 바진의 독자(讀者)였다. 1936년 18세의 샤오산가 바진에게 팬레터를 보낸 것을 계기로 서로 알게 되었다. 당시 바진은 32세였는데, 일을 위해 그들은 장장 8년이란 긴 세월동안 연애를 하다가 바진이 40세가 되었을 무렵 꾸이양(貴陽)에서 결혼하였고 1남1녀를 낳았다. 그리고 28년간 같이 사는 내내 그들은 단 한번도 싸운 적도, 얼굴을 붉힌 적도 없었다.

문화혁명기간, 샤오산은 바진과 함께 고통을 감수했다. 바진은 샤오산에게 자신이 받은 수많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샤오진은 바진을 보호하기 위해 홍위병의 혁대로 맞은 적도 있었지만 바진이 슬퍼하지 않도록 묵묵히 참았다.

1972년, 직장암에 걸린 샤오진이 세상을 하직했다. 임종 전 그녀는 바진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샤오산이 죽은 뒤 누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하였다. 그녀의 유골은 줄곧 바진의 침실에 놓여있었고 그녀의 번역작품은 바진의 침대 맡에 항상 놓여져 있었는데 바진은 시시때때로 그녀의 물건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는 샤오산에 대한 자신의 깊고도 영원한 사랑을 <샤오산을 그리워하며(怀念萧珊)>, <샤오산을 회상하며(再忆萧珊)>, <아름다운 두 눈동자(一双美丽的眼睛)> 등과 같은 글에 담았다. 그는 자주 “샤오산은 내 생명의 일부분입니다. 그녀의 유골에는 나의 눈물과 피가 섞여있소…내가 작업능력을 상실했을 때 내 병상에 그녀가 번역한 소설 몇 권이 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내가 두 눈을 영원히 감게 되면 내 유골을 그녀의 유골과 함께 섞여주시오”라고 말했다.

누가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고 했는가? 바진의 마음속에 샤오산에 대한 사랑이 영원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샤오산이 죽어 유골이 되었어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던 것이다.


 

3. 우주광(吳祖光:오조광)과 신펑사(新鳳霞)

 

 

 이들의 사랑은 마치 동화처럼 완벽했으며 우주광이 세상을 떠날 때조차 우연의 일치를 보였다. 2003년4월9일, 우주광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3일 뒤가 바로 그의 아내 신펑사가 세상을 떠난 지 5주년 되는 기일이었다.

우주광은 17세에 문단에 뛰어들었으며 19세에 항일을 소재로 한 극본<봉황성(鳳凰城)>을 썼다. 그리고 <정기가(正氣歌)>,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등의 명작들을 연이어 내놓음으로써 한순간에 연극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일생동안 30여 편의 극본을 쓴 우주광은 중국 현대 연극계에 매우 대표적인 극작가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신펑사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글을 모를 뿐만 아니라 경극으로 대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러다 라오서(老舍:노사) 선생의 소개로 우주광을 소개받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 우주광과 신펑사는 영락없이 “왕자와 신데렐라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들의 결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결국엔 유리 구두를 신었다. 1951년 예술에 대한 공통된 추구와 서로에 대한 마음으로 우주광과 신펑사는 결국 행복하게 맺어졌다. 우주광은 신펑사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치고 책을 읽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를 위해 칫솔과 치약을 항상 준비했다.

세상에는 그들과 같은 동화가 무수히 많지만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봄꽃은 피어도 끝까지 행복한 결말을 얻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주광과 신펑사의 관계는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한결같았다. 문화혁명 속에서 우주광은 연극계의 '우파(右派)'라는 이유로 모질게 매 맞았고 많은 사람들이 신펑사에게 그와 이혼할 것을 권유했다. 한창 젊었던 신펑사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를 기다릴거예요.” 문화혁명 동안 모진 고통을 겪은 신사펑은 휠체어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우주광은 그녀 삶의 햇빛이 되어 그녀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였다.

1998년, 신사펑이 뇌출혈로 세상을 뜨자 우주광은 끝없는 실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가족들에게  “사람이 정말 죽을 수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우주광은 마치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망연자실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죽은 아내를 기념하는 글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글은 신펑사를 기리는 단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적다가, 울고 그러다가 멈추고.......내 생애 이렇게 글을 쓰기가 어렵고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녀가 매일 앉아있던 자리에서, 책상 앞에서, 새벽, 황혼, 등잔 밑에서 항상 그녀가 여전히 늘 그곳에 앉아있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신펑사를 잃은 우주광의 여생에서 남은 것은 병(病)과 그리움뿐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인과의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

 

 

4. 싼마오(三毛:삼모)와 호세

 

 

패스트푸드식 사랑이 만연하는 시대에 싼마오(중국여류작가)와 호세의 로맨스는 약간 사실이 아닌 듯 하지만 결말은 해피엔드에 속한다.

'연상연하커플'인 그들의 사랑은 어쩌면 숫자 '6'과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호세가 싼마오에게 6년을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싼마오는 6년 안에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응하지 않았다.

6년간 연락이 없던 어느 날, 싼마오는 친구가 불러서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 얼굴 가득 구레나룻을 한 호세였다! 이때 흥분이란 말밖에 다른 적당한 단어로 두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호세는 싼마오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방에는 온통 그녀의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그리고 싼마오와 호세는 호수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6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냈다.

호세가 죽자 싼마오는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호세의 영전을 지키는 날 밤, 싼마오는 호세에게 말했다. “겁내지 말아요. 곧장 앞으로 가면 어두운 터널이 보이겠지만 걷다보면 눈부신 빛이 있을 거예요. 난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니 당신을 따라갈 수 없어요. 당신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말을 마치자, 싼마오는 호세의 눈에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호세, 당신 곁에 있게 해주면 다시는 눈물을 흘릴 일도, 통곡하는 일도 없이 당신만을 기댈거예요. 지난 세월처럼요.”

싼마오의 글에는 그녀의 나약함과 비통함은 적지만 그리움과 하소연 그리고 회상이 대부분이다. 살며시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그녀가 그렇게 떠날 수 있었는지 생각할 수 없다.(부연설명: 싼마오는 목매어 자살했다고 함) 그러나 늘 그녀가 “만약 내가 생명을 끊는다면 그것은 내게는 행복한 결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고 한 말의 뜻을 계속 생각해본다. 이 말로 우리들은 진정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문장출처: 许昌晨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