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완령옥의 비극적인 인생(下)

simpara 2009. 7. 15. 14:33

 

 

 

장달민의 횡포와 당계산의 진실되지 못한 마음으로 인해 완령옥은 다시 한번 감정적으로 기댈 곳을 잃어버렸다. 완령옥은 마음속에 있는 슬픔과 고통을 그녀가 연기하는 배역으로 승화시켰다. 이때 우연히 그녀의 세 번째 남자가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완령옥이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결국 완령옥은 그마저 포기하였고 이 때문에 피의 대가를 치렀다.

그녀가 연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영화 한편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 영화가 바로 《신여성》이다. 《신여성》은 젊은 감독이자 후에 유명한 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채초생(蔡楚生:차이추성)감독이 찍은 영화이다. 《어광곡(漁光曲)》역시 채초생이 감독한 것으로 1930년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탔다. 중국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국제무대에서 상을 탄 감독이 바로 채초생이었던 것이다. 당시 채초생은 《신여성》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령옥을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극중에서 여주인공은 마지막에 자살을 한다. 여주인공은 침대에 누워있으나 이미 그녀는 약을 삼킨 뒤이다. 하지만 그녀는 문득 자신이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죽으면 모든 죄악도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순간 생명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나 죽기 직전 의사에게 말한다. “살려주세요, 난 살아야해요.”

이 장면은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완령옥의 연기에 감동하여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완령옥의 연기가 왜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첫째는 연기력 덕분이었지만 주된 이유는 자신의 상황과 극중 인물의 상황이 비슷하여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채초생은 그 장면을 찍은 뒤 스태프들을 모두 나가게 하고서는 침대 맡에서 묵묵히 완령옥의 곁에 있어주었다.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완령옥은 채초생에게 말했다. “저도 이런 신여성이 얼마나 되고 싶은지 몰라요. 저도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는 신여성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전 너무 약해요. 그녀처럼 강하지 못해요.” 그때 완령옥은 자신의 삶도 매우 비극적이 될 것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25세가 되던 해, 모든 비극의 복선이 그녀가 25세가 됐을 때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아마도 모두가 앞에서 완령옥의 비극이 세 남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까지 두 명의 남자가 나왔다. 하지만 사실 세 번째 남자도 이미 나타났다. 바로 재능 있는 감독인 채초생이다. 채초생과 완령옥은 같은 고향사람으로 그들의 감정이나 그들의 우정은 순전히 촬영장에서 비롯됐다. 채초생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많은 감독들이 모두 해외유학파이자 예술학교출신이었지만 그는 견습생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점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영화촬영장에서 잡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감독의 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재능 있는 감독, 유명한 감독이 되었다. 채초생의 이런 배경은 완령옥과 채초생을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두 사람 다 광둥 출신에다 같은 취미가 있었으며 비슷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채초생과 완령옥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완령옥은 보모의 딸이었다. 그러나 완령옥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장달민이 후에《나와 완령옥》이란 책을 내면서 구구절절 사실만을 적었지만 완령옥이 보모의 딸이란 것만은 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완령옥이 죽은 뒤 장달민에게 조금의 양심은 있어 완령옥을 위해 비밀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장달민 외에 유일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채초생이었다. 책《완령옥》의 첫 열줄 가운데 완령옥이 하인의 딸이었다란 구절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결국 누가 폭로한 것일까? 이는 1957년 채초생이 완령옥이 죽은 지 22주년을 기념할 때 밝힌 것이었다. 완령옥은 채초생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한 출신이라는데 공감하여 그와 매우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 자신이 보모의 딸이란 사실과 어떻게 해서 장달민과 동거하게 됐는지 또 어떻게 해서 당계산을 알게 되고 동거하게 됐는지 그리고 당계산이 다른 무희를 좋아하게 됐고 자신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전부 말해줬었다.

활발한 영화 활동을 하고 있던 완령옥은 《신여성》을 다 찍은 뒤 감독인 채초생 사이에 감정이 발전하였고 둘 사이에 남모를 애정이 싹텄다. 둘의 관계는 1984년 채초생 감독이 세상을 떠난 후, 저명한 작가이자 영화계 선배인 가령(柯靈:커링)선생이 중국영화기념대회 석상에서 처음으로 완령옥과 채초생 감독의 사랑을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신여성》을 촬영하면서 두 사람은 예술가로서 서로를 사모했지만 타오르는 열정을 애써 잘라버렸다. 그리고 운명을 바꾸려고 했던 완령옥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극도 아마 피했을지도 모른다. 거듭 말해서 완령옥의 세 번째 남자는 재능이 뛰어난 감독 채초생이었다. 완령옥이 가장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더군다나 그녀가 장달민과 당계산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채초생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한 적이 있었다. 완령옥은 채초생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구해달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들이 아는 것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완령옥이 세 남자 사이에서 뒤엉킨 감정의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영화《신여성》이 기자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기자들은 공격의 칼날을 직접적으로 여주인공을 분했던 완령옥을 향해 겨누었다. 완령옥은 상처받은 마음에다 기자들의 공격까지 당하는 힘든 상황 속에서 1935년 3월 8일 “人言可畏(사람의 말이 무섭다)”는 유서를 남기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정말 ‘언론’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을까? 완령옥이 죽은 뒤 몇 십 년간 감추어진 진짜라고 생각되어지는 그녀의 유서가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이 진짜 유서는 또 무엇을 제시하는 것일까?

왜 3월 8일에 완령옥이 자살했을까? 모든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줄곧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당계산에게 유서를 공개하라고 했으나 처음에 그는 거부하며 말했다. “이건 완령옥이 내게 준 마지막 물건이니 건네줄 수가 없습니다. 난 이것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끊임없이 그에게 유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당계산은 말했다. “그녀는 날 너무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완령옥의 유서에는 남에게 공개하기 부끄러운 부분도 있고 해서 공개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끈질기게 그에게 유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결국 그는 완령옥의 유서를 내놓았다. 이 유서는 현재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계산: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계속 잘 되길 바랄게요. 난 갑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모함 받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유서의 마지막에는 “人言可畏(사람의 말이 무섭다)”는 말이 연이어 두어 번 적혀있었다. 이 유서의 출현으로 모든 사람들이 완령옥이 여론의 압력을 견디기 힘들어서, 장달민과 당계사의 소송건이 그녀의 명예에 타격을 준 것이 견디기 힘들어서, 또한 그녀가 비극적인 역할을 너무 많이 한 후유증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치 죽은 뒤에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후에 당사자의 양심고백과 중국영화100주년을 맞이함에 따라 우리들은 계속해서 창고 안에 있는 자료들을 찾다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계산이 사람들에게 완령옥의 유서를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발행양이 적은 신문인 <사명상학보(思明商學報)>에서 뜻밖에 완령옥의 유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유서는 후에 당계산과 동거하게 된 여배우 양새진이 제공한 것으로, 완령옥이 당계산에게 쓴 것이었다.


“계산:

당신이 “XXX”(양새진)에게 끌리지 않았다면, 그날 밤도 또 오늘밤도 날 때리지 않았다면 아마 난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이 여자를 갖고 논 악마라고, 그리고 난 영혼이 없는 여자라고 사람들이 말하겠죠. 하지만 그때 이미 난 세상에 있지 않으니 혼자서 다 감수하세요! 과거에는 직운, 오늘에는 나 그리고 내일에는 또 누군가요. 당신이 알고 있으면 됐어요. 난 죽어요. 하지만 감히 당신을 원망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잘 대해주길 바라요. 롄화사가 내게 2050위안을 아직 주지 못했으니까 애들을 키우는데 그 돈을 써주세요. 그리고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당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니까! 내가 없으면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난 만족해요.”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유서이다. 두 번째 유서는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홍콩의 한 신문에 발표되었다. 두 번째 유서가 발표된 후, 양새진과 그녀의 동생은 종적을 감추어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종적을 감추었다는데서 우리들은 두 번째 유서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두 번째 유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당계산을 모함하려고 일부러 두 번째 유서를 위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필자는 완령옥을 전문으로 연구한 적이 있는 심적(沈寂:선지)선생 등 영화계의 많은 원로들과 함께 완령옥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했으며, 그들의 인터뷰와 자료정리를 통해 우리들은 그녀의 소소한 일들이 모두 두 번째 유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완령옥의 기사의 증언이다. 그는 1935년 3월 8일 저녁에 완령옥과 당계산이 연회에 참가하여 매우 늦은 시각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당계산과 그녀가 차 안에서 말싸움을 격하게 벌인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둘째는 완령옥과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사람이 여러 번 그녀가 대문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당계산이 그녀를 집안에 들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계산은 완령옥의 어머니가 문을 열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녀를 문밖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시 이웃사람은 그래도 유명한 배우인데 어떻게 저러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웃사람의 기억에서, 그리고 그녀가 죽던 날 기사의 회상에서 우리들은 어제도 때리고 오늘도 때리는 그런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셋째는 완령옥이 약을 먹었을 때이다. 그녀가 약을 먹은 후의 상황이 어땠는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완령옥의 모친과 당계산의 얘기에 의한 것뿐이다. 당시 당계산은 그녀가 약을 먹고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때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는 완령옥이 약을 먹은지 불과 두 시간이 지난 직후였다. 하지만 조금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약간의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을 때 빨리 치료하여 위를 세척하고 독을 희석시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때는 시간이 관건이다. 그런데 완령옥이 수면제를 먹은 것을 발견했을 때 당계산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녀를 어떻게 구하느냐가 아니라 완령옥을 큰 병원으로 데려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유명배우이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갖가지 루머로 들끓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1928년 완령옥이 자실을 시도했을 때 일본인 병원에 간 것을 기억했다. 일본인 병원은 외딴 곳에 있었는데 환자에 대한 것은 일체 비밀로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당계산은 차를 몰고 완령옥을 일본인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일본인 병원은 완령옥의 집에서 매우 떨어져 있었고 몇 시간을 운전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인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원에는 응급실이 없었고 의사도 없었다. 당계산은 그래도 완령옥을 큰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30년대 상하이에는 의료수준이 뛰어난 교회병원이 많이 있었지만 당계산은 그곳에 완령옥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아마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당계산은 완령옥을 개인병원을 하는 자신의 친구에게 데려갔다. 그때는 완령옥이 약을 삼킨 뒤 이미 6시간이 지나 매우 위급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계산의 친구도 당계산이 이미 손쓸 도리가 없는 환자를 데려온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의사를 더 모시고 진찰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사실 그는 증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는 완령옥이 자신의 진료소에서 죽은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사들도 완령옥을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한결같이 권했다.

결국 그들은 완령옥을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때는 이미 오전이었다. 새벽 두시쯤에 수면제를 먹은 완령옥을 큰 병원으로 옮긴 시각이 오전 10시였던 것이다. 당시 완령옥의 영화사에 몸담고 있던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민위(李民偉:리민위)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 완령옥을 개인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는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 사진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완령옥을 데리고 이리저리 병원을 옮긴 것을 찍음으로써 당계산의 냉혹함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당계산에게는 완령옥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의 진상을 덮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결국 완령옥이 남자의 무정함과 사랑에 대한 환멸로 기댈 곳을 잃고 벼랑 끝으로 내몰려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는 있을 때 아직 살아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인간의 냉혹함이 완령옥을 두 번 죽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와 중국영화계의 원로인인 심적선생은 자료 분석을 통해 두 번째 유서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만약 완령옥이 당계산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당계산도 그토록 완령옥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죽음까지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 완령옥을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 완령옥이 언론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워서 죽었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완령옥의 죽음에서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복잡한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아울러 그 시대 여성의 운명도 볼 수 있었다.

앞에서 완령옥의 죽음이 세 남자와 그녀 자신의 비극적인 성격과 인간이 무서워서였다고 말했었다. 바꿔 말하자면, 완령옥 그녀자신의 한계가 비극을 만들었다. 무엇이 비극인가? 첫째는 인생에 있어 가치 있는 것들이 파괴되는 비극이다. 둘째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와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운명, 환경, 사회간의 갈등이 결국 비참한 결과까지 가는 비극이다. 진정한 비극은 외부에서 힘든 상황을 더욱 가중시켰을 때 힘든 상황에 굴복한 나약함이 비극으로 바뀌는 것이다. 완령옥의 비극은 두 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바로 외부에서 그녀의 불행을 더욱 심화시켰을 때, 그녀의 고난과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을 때 그녀는 스스로 이 비극을 완성시켰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완령옥은 자신의 인생역정에서 추구하고, 몸부림치고, 탐색하는 가운데 자기인생의 한계를 줄곧 뛰어넘지 못하고 남자, 남자, 남자.......결국 마지막까지 남자에게 의지했다. 영화《완령옥》의 주제가 <장심(葬心)>은 바로 마음을 파묻어버린다는 뜻이다. 주제가 가사 중 두 구절이 특히 와 닿는다. 바로 "약간의 사랑을 탐내고 약간 기댈 곳을 탐낸다"는 부분이다. 완령옥은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기댈 곳을 탐내었으며 약간의 허영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은 사실 여자로서 매우 보잘 것 없는 요구이자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완령옥의 유서】


당계사가 제공한 유서


人言可畏(사람의 말이 무섭다)


내가 지금 죽으면 사람들은 분명 내가 죄가 무서워서 그런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겁내겠어요. 장달민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어요. 다른 것은 잠시 제쳐두고라도 그와의 동거를 그만뒀을 때를 들자면 이후에도 매달 그에게 일백위안을 보냈죠. 빈말이 아니라 증거와 영수증이 있어요. 그런데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고 오히려 원망을 했으며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죠. 아, 무슨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죽음밖에 없더군요. 내가 죽는다고 아쉬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 사람들의 말이 무서울 뿐이에요.


3월 7일

 

자정 무렵 당계사에게

계산:

이렇게 빨리 당신과 사별하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요. 하지만 슬퍼하진 말아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니까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나 때문에 고통을 받게 해서 미안해요. 지금 그가 백방으로 당신과 나를 음해하려고 하지만 언젠가 진실이 밝혀져서 벌을 받는 날, 그가 또 어떻게 살아갈지 볼 거예요. 새가 죽을 때가 되면 지저귀는 소리가 애달프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선한 말을 하게 되는 법이라고 하죠. 영원히 당신을 보호할 거예요. 내가 죽은 뒤에 제게 남은 돈으로 어머니와 아이들을 부양해주세요. 만약 돈이 부족하다면 당신이 수고 좀 해주세요. 특히 어머니가 내 뒤를 따라오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주길 바라요. 이것이 당신에게 바라는 전부예요. 만약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내 바람을 저버리지 말아주세요. 인연이 있다면 내세에서 만날 수 있겠죠! 영화사가 내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돈으로 어머니와 아이들을 부양하는데 써주세요. 모두 2050위안이니 필요할 때 쓰세요. 또 다른 편지 한통은, 만약 사람들이 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시 공개하고 모르게 된다면 그냥 놔두세요.


3월 7일 자정

 

 <사명상학보(思明商學報)>에 실린 완령옥의 유서

 

첫 번째 유서

 

달민: 당신 때문에 죽게 됐다는 것을 누가 믿을까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헤어진 후 매달 당신에게 일백위안을 보내준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가요? 정말 양심도 없군요. 지금 난 죽으니 이제는 만족하겠죠! 사람들은 내가 죄가 무서워서 그런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무섭겠어요. 난 다만 당신네들 두 사람의 쟁탈품이 된 것을 너무나 후회할 뿐이에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울 필요는 없어요. 난 살 수 없게 됐으니까! 뉘우칠 필요도 없어요.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까.

 

두 번째 유서

 

계산: 당신이 “XXX”(양새진)에게 끌리지 않았다면, 그날 밤도 또 오늘밤도 날 때리지 않았다면 아마 난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이 여자를 갖고 논 악마라고, 그리고 난 영혼이 없는 여자라고 사람들이 말하겠죠. 하지만 그땐 이미 난 세상에 없으니 혼자서 감수하세요! 과거에는 직운, 오늘에는 나 그리고 내일에는 누군가요. 당신이 알고 있으면 됐어요. 난 죽어요. 하지만 감히 당신을 원망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잘 대해주길 바라요. 롄화사가 내게 2050위안을 아직 주지 못했으니까 아이들을 키우는데 그 돈을 써주세요. 그리고 애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당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니까! 내가 없으면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난 만족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