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중국 제1대 영화계의 여왕 장직운의 비극적인 인생

simpara 2009. 9. 3. 17:30

 

 

                                                         장직운(張織云:장즈윈)

 

중국 초기 영화계에서 비극배역의 꽃이라고 일컫는 배우 중 하나가 완령옥(阮玲玉:루안링위)이었다면 다른 또 하나가 장직운(張織云:장즈윈)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광둥(廣東)출신에 양녀였으며 둘 다 차(茶)상인 당계산(唐季珊:탕지산)과 같이 동거한 적이 있는데 이런 갖가지 우연의 일치가 정말 불가사의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장석천(張石川:장스촨) 감독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카메라 앞의 배우가 감독의 지시대로 60%이상 해낼 수 있다면 이미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고 70%이상 해낼 수 있으면 재목감인 셈이다. 완령옥은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알아서 감독이 생각한 것의 90%이상까지 해내니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보배라 할 수 있다. 장직운은 학력이 높지 않았고 광둥어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 영화계에 입문해서 그녀에게 연기지도를 하는데 매우 고생했고 완령옥의 연기와 비교해 상대가 안됐다. 하지만 장직운은 매우 겸손했기 때문에 후에 스타가 되었다.”

장직운은 1904년생으로 광둥 사람이다. 어렸을 때 매우 불행하여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양모를 따라 상하이에 와서 자랐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도 채 못 끝내고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으며 1924년 상하이대중화영화제작사에 들어갔다.

장직운이 뽑힌 것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924년 초, 대중화영화제작사 창립자 몇 명이서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고 신문사 우편함을 빌려 접수를 받았다. 10일 후 우편함을 개봉하니 만여 장의 여자사진이 있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이 우편함이 원래 신문사 내 어떤 기자의 사서함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영화제작사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인 고긍부(顧肯夫:구컨푸)가 기자를 찾아내었고 기자는 자신이 몰래 빼돌린 10장의 사진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 장직운 사진이 한 장 끼어있었다. 장직운은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진도난사건으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되었고 영화제작사는 이를 빌미로 홍보하였다.

그 후 장직운은 무성영화 <인심(人心)>, <전공(戰功)>에서 여주인공을 맡아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25년 명성영화제작사로 옮긴 장직운은 <불쌍한 처녀(可怜的闺女)>, <공곡란(空谷兰)> 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활약했다. <공곡란>을 연기할 때 명성영화사는 적극 영화를 홍보하여 영화표와 함께 사진첩을 증정하였고 장직운은 점차 인기 있는 스타가 되었으며, <공곡란>은 무성영화사상 최고의 수입기록을 세우며 상하이에서만 13만 2천 3백 위안을 벌어들였다. 이때가 장직운의 영화인생에서 가장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장직운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면서 슬픈 한을 간직한 여인의 이미지로 그 시대 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장직운이 <옥결빙청(玉洁冰清)>을 찍을 때 감독인 복만창(卜萬蒼)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실연을 당한 시골소녀를 연기했는데 연기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비극연기의 달인”이란 명칭을 얻었다. 일적인 관계로 만난 장직운과 복만창 감독의 감정은 점차 발전되었고 동거까지 하게 된 그들에게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직운의 인기가 점점 치솟게 됨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옥결빙청>을 찍을 때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제작사 사장인 여민위(黎民偉:리민웨이)가 장직운을 마음에 두고 사장 신분으로 복만창에게 자신을 남자주인공으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각본을 쓴 구양여천(歐陽予倩) 역시 자신이 남자주인공을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맡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복만창 감독은 진퇴양난에 빠졌지만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여민위와 구양여천을 청해 각자 시범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민위는 중년을 넘은지라 젊은이와 같은 활기참이 없었고, 구양여천은 원래 경극배우 출신인지라 분장을 진하게 하고 나타나 둘 다 배역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배역은 공가의(龔稼衣)에게 돌아갔다. 복만창 감독과 여민위는 이 일로 알게 모르게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옥결빙청>의 촬영을 막 끝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복만창 감독은 명성영화사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장직운과 복만창의 감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결정적인 도화선의 주범은 명성영화사의 또 다른 사장 이응생(李應生:리잉성)의 부인이었다. 프랑스유학파인 이응생은 상하이 프랑스조계지 책임번역가로 그의 부인은 보석장사를 했는데 사교장을 출입하면서 거상들을 접대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 영화배우는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스타와 같이 식사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은 신분이 상승되는 기분이 드는 듯 했다. 이응생의 부인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자주 사장 부인으로서 접대를 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복만창도 같이 초대했으나 나중에는 장직운만 초대하였다. 낌새가 좋지 않음을 느낀 복만창은 장직운에게 접대를 자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장직운은 막 호화로운 생활을 접해서 신기했으며 노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아 복만창의 말을 그냥 흘려버리고 더 깊숙이 사교생활에 빠졌다. 후에 장직운은 사교장에서 사람을 많이 알게 될 수록 교제도 빈번해졌다.

장직운은 마치 한 떨기 연꽃처럼 청아하고 순수하게 생겨서 부자들의 구애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차츰 복만창을 깔보기 시작했으며 그가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만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차 싸우는 횟수가 늘어났으며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복만창에 대한 장직운의 사랑도 점점 흔들리게 되었다.

중국 여자영화배우들 중에는 영화촬영에서 애정생활까지 딸의 모든 것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대단한 어머니들이 많았다. 장직운의 양모가 바로 이런 골치 아픈 어머니였다. 그녀의 계산적인 눈으로 봤을 때 복만창은 고작 월급에 의존해 생활하는 감독일 뿐, 부유한 부자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장직운의 양모는 딸과 복만창의 동거가 영양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잣집 사위를 얻는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장직운에게 사교계에 나가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장직운은 복만창에게 더욱 냉담해졌고 좋은 얼굴로 대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이때 마침 영화계 여왕을 뽑는 경선이 있었는데 경선에 참가하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복만창은 장직운의 참가를 반대했는데 사실 그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녀를 지원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사교장에서 알게 된 당계산(唐季山)이 바로 이틈을 타 거액의 돈으로 그녀의 경선 참가를 지원하여 점차 그녀의 환심을 얻게 되었다. 장직운이 당선된 후 그녀와 당계산은 날로 가까워져 소문이 돌았고 복만창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옥결빙청>의 촬영완료 전 타이호(太湖)에 촬영을 갔을 때 장직운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고 복만창과 한바탕 크게 말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촬영팀이 상하이로 돌아오자 가디렸다는 듯 장직운은 홍커우(虹口)에 양모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복만창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장직운의 귀중품이 깡그리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장직운 양모가 가져간 것이었다. 그리고 양모는 장직운에게 복만창과 헤어질 것을 계속 종용했다.

복만창은 장직운과의 인연이 다 된 것을 알고 친구의 중재를 통해 그녀와 헤어질 것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장직운이 자신과 한 번 더 영화 한편을 찍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 후, 장직운은 복만창 감독의 영화<약혼녀(未婚妻)>의 주연을 맡음으로써 감정상의 빚을 청산하였다.  

한편 심혈을 다 기울여 결국 미인을 품에 안게 된 당계산은 장직운과의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계산은 장직운을 미국에 데리고 가서 “영화계 여왕”이란 그녀의 후광을 빌려 그의 찻잎사업을 홍보하였다.

귀국 후, 장직운은 <사랑과 황금(爱情和黄金)>, <가족을 위한 희생(为亲牺牲)>, <매화락(梅花落)>에 주연을 맡은 후 바로 영화계를 은퇴하여 오년 동안 영화계에서 얻은 영예와 지위를 아낌없이 버리고 부잣집 마나님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하지만 후에 마약을 하게 되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은 몇 년 가지 못했다. 장직운은 자신의 생활이 상상하던 것처럼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계산은 돈만 많았지 바람둥이었고, 그런 그에게 그녀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고 당시 당계산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장직운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부인과 왕래하였다. 결국 그녀는 단지 그와 동거하는 정부일 뿐, 그의 집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었고 심지어 첩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더구나 바람기가 많은 당계산은 줄곧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러나 가장 장직운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싫증을 잘 내던 당계산이 미국에서 막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배우인 완령옥을 쫓아다니다 결국 그녀를 버린 일이었다. 당계산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장직운을 차버렸다. 당계산과 장직운이 동거하기 전, 당계산이 그녀의 양모와 ‘만약 그가 장직운을 버릴 때 이천만 위안을 내놓기만 하면 바로 동거를 끝낸다’는 선약을 했었다는 것을 알았던 장직운이었지만 그와의 이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악연을 위해 그녀는 청춘과 창창한 영화배우로서의 삷을 내던지는 심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당계산과 헤어진 후, 장직운은 활동을 재개할 심산으로 명성영화사 <실연>의 주연을 따내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중국은 이미 유성영화시대로 그녀의 어색한 표준어는 유성영화의 요구에 맞지 않았으며 더구나 영화계에서 그녀의 지위 역시 일찌감치 완령옥, 호접(蝴蝶:후디에) 등에게 넘어가 결국 그녀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1대 영화계 여왕은 이렇게 은막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장직운은 일찍이 완령옥에게 직접적으로 “당계산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세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완령옥은 그때 이미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고 결국 생명을 끊음으로써 전국을 자살보도로 들끓게 만들었다.

당계산과 헤어진 후 장직운은 “많은 친구와 관중을 희생한 사랑은 중요치 않으나 나의 ”황금시대“가 이미 청춘과 함께 사라진 것은 너무나 안타까워요”라고 매우 침통하게 말했다. 장직운은 한평생 13편의 비극영화에 주연으로 활약했고 자신도 영화 속의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인생으로 몰락하였다.

장직운의 말년은 매우 처량했다. 그녀는 젊었을 때 영화배우로서의 영광을 잊지 못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쉴새없이 떠들어댔지만 전부 늙은 노인네의 추억담에 불과했다. 후에 그녀는 모아둔 돈을 다 써버려 매일 방세로 걱정하다 결국 거리에서 구걸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홍콩의 한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출처: 楚天金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