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북

코카콜라 중국입성기

simpara 2009. 5. 14. 13:20

 1979년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었다. 당시 코카콜라의 판매는 중국에 와서 일하거나 여행을 온 외국인에게만 팔게 했으며, 판매장소는 주로 외국인대상백화점인 우의상점(友誼商店)이었다. 현재 베이징 건국문 부근에 위치한 우의상점은 이제 일반 중국인에게 신비로울 것도 없으며, 지금은 우의상점에서 코카콜라를 살 수 있다. 현재 식품부 책임자가 1979년 코카콜라의 가격이 한 병에 약 4마오(한화 70원정도) 정도 했다고 알려주었다. 계획경제시대, 우의상점은 사치품의 상징이었다. 많은 언론매체가 코카콜라가 중국에 진입하게 된 시기를 1970년부터라고 본다. 당시 중국은 코카콜라를 우의상점 및 관광호텔에서만 판매하도록 강제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엄격하게 제재를 해도 서양음료를 마신 중국인이 있긴 있었다. 신문기록에 따르면, 서쪽성 부근에 사는 저우위에밍(周月明)선생의 둘째 아들이 외교관이라 외화로 우의상점에서 코카콜라와 수입캔디를 사서 친척과 친구들을 대접했는데, '보기 드문 간식' 때문에 손님들이 너무나 부러워했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출생한 중국인들은 오직 영화속에서만 코카콜라를 봤는데, 당시 코카콜라는 항상 미국군인과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그 이미지는 단순히 음료의 차원을 넘어섰다. 비록 개방의 물결로 코카콜라와 펩시 등 미국회사가 기회를 틈타 중국시장에 진출하려고 했지만, 당시 중국은 그래도 서방의 라이프스타일을 대표하는 상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77년, 정치상황이 점차 밝아지면서 ###가 중국정치권력의 중심으로 되돌아갔으며, 코카콜라는 다시 중국에 진출할 의사를 전했다. 그 해, 코카콜라사의 회장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공장건설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중국 측이 “지금 시기가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중국인이 당신네 코카콜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우리들이 중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것은 결코 중국소비자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해외소비자를 주로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 소비자는 바로 중국에 와서 여행하는 외국인, 특히 유럽인과 미국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코카콜라는 약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현재 미국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코카콜라를 마시며 컸으며, 유럽인 및 미국인들에게는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군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들은 단지 생산자일 뿐이고 그들은 소비자일 뿐 별다른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탄산수에 감미를 첨가하여 돈을 버는 회사에 불과합니다. 유럽 대부분 국가에 코카콜라 공장이 있으며, 60년대 이후에는 아프리카, 아시아에도 우리들의 공장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그곳에 많은 젊은이들도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코카콜라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우리들은 언제든지 달려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상인이니까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상인이니까요'라는 솔직하면서도 정치와의 관계를 탈피한 이 말은 양측 사이에 놓여있던 벽을 깨뜨렸다.

 그리하여 협상이 시작됐으며, 코카콜라사는 결국 차근차근 상부의 지시요청서를 거쳐 중국 코프코(COFCO)와 계약을 맺어 중국에 진출했다. <중량지(中粮志)>의 기록에 따르면 코카콜라사의 중국입성기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78년 11차 3중 전체회의가 열리기 전, 코프코 사장직에 있던 장젠화(張建華)가 코카콜라를 중국에 들이자고 건의했고, 당시 리치앙(李强) 외교부통상부 장관이 동의하였다. 1978년 12월 13일, 코프코와 코카콜라사가 보상무역방식 혹은 기타지불방식을 채택하여 중국 주요도시 및 관광지에 코카콜라 캔과 병을 제공하여 판매하도록 계약하였다. 코카콜라 공장이 설립되기 전, 1979년부터 위탁판매방식으로 코프코가 코카콜라를 판매하였다.

 코프코의 계획과 홍콩 Ng Fung사와의 협조로 코카콜라 3000상자가 1979년 말에 홍콩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당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중국이 코카콜라의 중국진출을 허락하여 협의를 체결한 4일 뒤인 1978년 12월 17일에야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중미수교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중미양방협정으로 1979년 1월 1일부터 대사급 외교관계의 건립”을 선포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민간“외교사절”인 코카콜라가 미국정부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코카콜라가 공장건설지역으로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것이 상하이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 소식이 흘러나오자마자 상하이에서 강력히 반대하며 “매국주의, 서양노예철학, 미국생활방식도입, 민족산업 타격” 등 각종 목소리가 상하이 인민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결국 코카콜라사는 어쩔 수 없이 상하이 대신 베이징에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도 몇 번의 우연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공장부지를 코프코 산하 베이징지사의 한 오리구이장으로 선택하게 됐지만, 사실 공장건물도 하나뿐이었고 단지 기존의 오리구이장을 비워준 것에 불과했다. 당시 양측은 중국측이 매년 30만 달러에 농축액을 사고 다른 생산라인은 모두 코카콜라사가 무료로 보내주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코카콜라사는 처음에 투자액을 60만 달러로 예상했으나 결국엔 공장을 짓는데 거의 100만 달러가 소요됐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매우 순조로웠지만 나중에는 의견에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코카콜라사가 베이징에 공장을 건설한 후, 한 노인이 “중국의 탄산수로는 국민들과 외국인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인가? 꼭 코카콜라이어야만 하는가? 그야말로 매국주의일세.”라고 노기등등해서 코프코측에게 이에 대해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코프코는 보고서를 써서 다음과 같은 5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① 코카콜라는 음료수이고 성공적인 판매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인을 비롯해 세계각지에서 코카콜라를 마신다. 중국의 개혁개방이후, 중국을 찾아오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코카콜라는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음료가 되었으며 우리는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킬 필요성이 있다.

② 코카콜라에 중국의 계피유를 사용하였다. 중국의 성분이 안에 첨가된 것이다.

③ 우리들이 탄산음료의 캔과 병 생산기술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설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들의 기술발전에 도움이 된다.

④ 우리들이 매년 30만 달러어치의 농축액을 사들이지만 이윤은 오히려 2~3배나 된다.

⑤ 우리들은 공장건설을 베이징에만 제한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정책에서도 코카콜라의 생산량이 중국음료 총생산량의 5%를 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공장건설 전에 허가수속을 하도록 되어있다.


결국 이러한 해명을 하고나서야 코카콜라에 대한 파장이 잠잠해졌다.

 

 

 

번역발췌출처: <不会尘封的记忆:百姓生活30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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