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칭링(좌)과 쑹메이링(우)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사이의 감정이 가장 순수했던 때는 청소년시절이었다. 1904년 큰언니인 쑹아이링(宋靄齡:송애령)이 중국의 첫 번째 미국유학생으로 미국의 조지아주 메이컨의 웨슬리안대학에 들어갔다. 큰언니의 유학에 힘입어 쑹칭링과 쑹메이링도 중국에서 유학에 필요한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쑹칭링은 쑹메이링보다 다섯 살 많았으며 조용하고 상냥하며 품위가 있었다. 쑹메이링은 명랑하고 활달하며 자신감에 넘쳤고 특히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에 대해 칭링은 항상 언니로서 동생이 학업에 열중하도록 다그쳤다. 하지만 가끔 그녀도 동생의 순진무구함에 이끌려 같이 낮은 담벼락을 넘어 근처에 있는 들에서 맘껏 장난치거나 개울가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미래의 유학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였다. 저녁에는 아버지가 얘기해주는 각종 신기한 경험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으며 즐거움이 넘치면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1908년, 16세인 쑹칭링과 11세인 쑹메이링은 결국 유학을 위한 필요한 과목들을 다 마치고 유학의 길을 떠났다. 숙부와 숙모의 보호 속에 자매는 큰언니가 있는 웨슬리안대학에 들어가 사년 동안 떨어져 있던 큰언니와 재회하였다. 그 이듬해, 그들을 보살펴주던 큰언니 아이링이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면서 칭링과 메이링은 더욱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 독립생활은 칭링을 사색을 좋아하고 어른스럽게 만들었다. 칭링을 의지하고 있던 메이링이었지만 타국에서도 그녀의 발랄하고 명랑한 성격은 여전했다.
1912년 봄, 자매는 집에서 보내 온 매우 '귀중한' 새해선물인 중화민국의 국기를 받았다.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자매는 그해 설에 중화민국이 난징(南京)에서 수립되었으며, 아버지와 큰언니가 쑨원(孫文:손문)의 임시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며 팔짝팔짝 뛰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기숙사에 걸어둔 청나라의 깃발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밟고 또 밟은 뒤 아버지가 보내준 새 국기를 걸었다. 그날 밤, 자매는 새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쑹칭링이 먼저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서 쑨원과 함께 일본에 도피해있던 부모님을 만났다.
1915년 10월 25일, 쑹칭링은 처음으로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쿄에서 쑨원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가정의 평화를 줄곧 중요하게 생각했던 쑹씨 집안에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 속에서 쑹칭링에게 위안이 된 것은 쑹메이링이었다. 온 집안사람들이 그녀의 결혼을 반대할 때 미국에 있던 쑹메이링이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을 거스른 그녀의 용기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혼으로 인한 집안의 갈등은 오히려 쑹칭링과 쑹메이링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쑹씨집안 자매들이 어렸을 적부터 쌓아왔던 깊은 정은 순조롭게 나아가지 못했다. 특히 정치적 힘겨루기의 소용돌이 속에 깊이 휘말린 집안에서 형제자매간의 정이 티끌하나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1927년, 쑹칭링과 허시앙닝(何香凝) 등 국민당좌파 지도자들이 연합서명하여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반역행위를 공격하고 국공합작을 호소하는 글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그녀는 편지로 남동생 쑹쯔원(宋子文송자문)에게 국민혁명을 도와주길 부탁했다. 그러나 쑹쯔원은 이미 장제스와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쑹칭링의 큰언니 쑹아이링과 합세해 쑹메이링을 꼬드겨 장제스와 결혼하도록 했다. 결국 분노에 휩싸인 쑹칭링과 쑹쯔원의 남매간 정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항일전쟁때, 국공 제2차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쑹칭링은 마침내 과거에 맺힌 감정을 접어두고 자매들 곁으로 돌아와 제부 장제스의 옆에 섰다. 그리고 장제스는 쑹칭링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 세계에 뿌렸다. 국부 쑨원의 부인이자 줄곧 공산당을 지지하던 쑹칭링과 좋은 사이가 됐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쑹칭링이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장제스가 나이가 많거나 출신이 안 좋아서가 아니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지(遺志)를 지키지 않고 국민혁명에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쑹칭링에게 장제스는 적인 동시에 제부였고, 그로 인해 쑹씨자매 사이에 마치 벽이 하나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더구나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중국전통 때문에 쑹칭링과 쑹메이링의 관계는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골이 그들 자매를 멀어지게 한 것이었다. 한동안 쑹메이링이 쑹칭링에게 쓴 편지는 모두 비서가 대필했다. 이러한 관계는 항전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1936년 12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시안(西安)사변이 터졌다. 쑹메이링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쑹칭링이 시안을 폭격하려는 허잉친(何應欽)의 음모에 반대하고 장제스를 석방토록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사변이 일어난 이튿날, 쑹칭링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 전화로 쑨커(孫科손과)에게 비행기를 준비하도록 일렀다. 그리고 허시앙닝과 약속을 잡아 함께 시안으로 가서 직접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양후청(楊虎城양호성)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렇게 쑹칭링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자 쑹메이링은 깊이 감동하였다.
쑹메이링은 쑹칭링의 대의적인 면모와 넓은 마음에 감탄했다. 1937년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수립으로 쑹씨자매는 앙금을 풀고 다시 협력하게 되었다. 1938년, 쑹칭링이 홍콩에서 “중국동맹보위”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뒤 쑹메이링도 홍콩에 도착했다. 쑹씨자매가 홍콩에 있는 호텔에서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최근 건강을 되찾아 얼굴이 좋아진 쑹메이링과 검은 색의 옷을 입고 윤기나는 머리에 두 눈 가득 즐거움을 담고 있는 쑹칭링이 서로 손을 잡고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 당시 따뜻한 분위기를 지금까지 잊지 못했다.
비록 쑹씨자매 사이의 감정이 회복되었지만, 장제스에 대한 쑹칭링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번은 쑹쯔량과 쑹쯔안이 충칭(重慶)에 도착했고 장제스가 두 처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했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에게 큰언니와 둘째언니를 같이 초청해 식사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쑹메이링은 둘째언니인 쑹칭링이 남편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언니에게 물어볼게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언니 쑹칭링에게 전화를 걸어 이 모임이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가족모임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쑹칭링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 완곡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장제스가 제의한 “가족모임”은 쑹칭링의 거절로 허사가 되었다.
쑹칭링의 반감, 냉담함 특히 정치활동에서의 잦은 부딪침으로 장제스는 쑹칭링에 대한 분노가 증오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지시로 쑹칭링에 대한 특수공작원의 협박과 위협이 점차 고조되었다. 하지만 쑹칭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공공장소에 얼굴을 내밀었다. 쑹메이링은 그런 언니가 걱정되어 오빠 쑹쯔원(송자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둘째언니에게 함부로 못하게 오빠가 그(다이리戴笠를 가리킴)에게 말해주세요. 만약 내 귀에 무슨 소리라도 들린다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거예요.” 쑹쯔원은 동생의 단호한 어투에 곧 다이리(戴笠)에게 이 말을 전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장제스와 쑹메이링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이 돼버렸다. 쑹칭링을 가만두자니 장제스가 두렵고, 건드리자니 부인이 가만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장제스도 어찌하지 못하는 여간내기가 아닌 '부인'이 정말 난리를 피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다이리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후, 특수공작원들은 쑹칭링과 관계된 일을 꺼려했고 함부로 쳐들어가지 못했다.
장제스란 벽을 경계로 쑹씨 자매는 서로 완전히 다른 정치생활권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정치적 울타리를 벗어나 계속 그들만의 친밀한 혈육의 정을 유지하였다. 그 후, 장제스 일가가 타이완(臺灣대만)으로 도망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면서 결국 자매는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981년 쑹칭링이 중병에 걸렸을 때 친구에게 부탁해 해외에 있는 쑹메이링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주중미국대사관도 즉시 쑹메이링에게 쑹칭링의 병세가 위급함을 알렸다. 쑹씨 자매에게도 상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쑹메이링은 결국 역사적 의미를 가진 한 발을 내밀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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