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루쉰과 저우쭤런의 불화

simpara 2009. 4. 13. 17:16

루쉰(魯迅: 본명-周樹人)의 개인사 가운데 그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결혼생활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주작인)과 의절한 일이었다. 루쉰은 생전에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묵묵히 견디며 오랫동안 자신을 희생하였고, 이것이 루쉰을 큰 고통 속에 빠뜨렸다. 뚜렷한 현대적 의식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불행한 가정환경 때문에 루쉰이 더욱 비극적인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기억으로 그들 형제는 불화의 원인에 대해 입을 꽉 다물었다. 루쉰과 저우쭤런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1923년 7월 19일이다. 그날 저우쭤런이 루쉰에게 절교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루쉰선생에게:

난 어제서야 비로소 알게됐습니다------그러나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꺼내지 말죠. 내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질책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냥 모두가 불쌍합니다. 이제껏 제가 꾸었던 장밋빛 꿈은 원래는 다 허상이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실이겠지요. 전 생각을 고쳐서 다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다시는 후원에 오시지 마세요.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7월18일 저우쭤런이 편지를 보낸 그날 밤, 루쉰은 일기에 “오전에 쭤런이 직접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중에 불러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보다 5일 전 일기에는 “밤부터 각자의 방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라고 적었다.

 이를 보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형제가 왜 이렇게 돼 버렸는지에 대해 다른 사람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의 친구인 장펑쥐(張鳳擧)와 촨따오(川島)는 두 형제의 일에 대해 대략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쉬서우창(許壽裳)의 <죽은 친구 루쉰에 대한 회상기>에서 두 형제간의 갈등을 언급하며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루쉰은 베이핑(北平)에 사는 것을 좋아했지만 시싼탸오(西三條) 골목에 집을 마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원래 1919년 샤오싱(紹興) 둥창(東唱) 골목의 낡은 집과 살고 있던 본가를 모두 팔아버리고 베이핑에 큰 집을 하나 장만하여 어머니와 가족들을 데려와 살았었다. 그 집은 방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마당이 매우 넓었다. 루쉰은 내게 '넓은 마당의 집을 고른 것은 아이들이 노는데 좋아서라네.”라고 말했다. 난 그 말에 “그렇군, 정말 운동회를 열어도 되겠어'라고 대꾸했다. 그때 루쉰은 아직 아이가 없었고, 동생 쭤런은 아이가 있었는데, 루쉰은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고 항상 아이들 눈높이에서 교육을 하였다. 

루쉰은 동생을 매우 아꼈으며, 동생을 귀찮게 하기 싫어 집안일은 모두 그 혼자서 처리하였다. 그는 저우쭤런의 일이라면 자신의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동생에게 모두 양보하였다. 저우쭤런의 일본인 부인 하부토 노부꼬(羽太信子)는 히스테리증세가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루쉰에게 공손히 대했지만 속으로는 시기하고 있었다. 저우쭤런은 경솔하게 부인의 말만 믿고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애써 적극 해명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루쉰이 어쩔 수 없이 손님방으로 옮겨가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으며, 루쉰이 사람을 시켜 얘기 좀 나누자고 전해도 나오지도 않았다. 결국 루쉰은 좐타(磚塔)골목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불화가 시작됐으며 이전의 훈훈했던 형제애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저우쭤런 일생에서 가장 큰 손실이었으며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언제나 자애로운 형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씻으려고 해도 씻지 못할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일까?

루쉰이 돈을 빌려 이사 간 시싼탸오의 집은 방이 세칸으로 된 작은 중국식 전통가옥구조의 집으로, 북쪽의 동쪽방은 어머니가, 서쪽방은 그의 부인의 방이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그의 서재가 있었다. 서재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저우쭤런과 노부꼬가 반발했던 얘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 작은 집을 장만한 루쉰은 책을 가지러 홀로 예전의 큰 집으로 갔다. 그런데 저우쭤런과 노부꼬가 매우 두려워하였고, 노부꼬는 급히 전화로 군인을 불러 외부의 힘으로 맞설려고 했다고 한다. 저우쭤런은 책 한권을 멀리 던져버렸지만 루쉰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책에만 신경썼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이 와서 뭐라 말하려고 하자, 침착하게 이것은 집안일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말했다. 군인은 할 말을 잃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는 책을 가지러 간 그 이튿날 루쉰이 내게 해준 것이다. 난 그에게 '책은 전부 가지고 나왔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루쉰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난 그에게 또 내가 일전에 준 <월만당일기>를 가지고 나왔는지를 묻자, 그는 '아니, 가져올 수 없었네'라고 답했다."

 

 불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저우쭤런의 아내

루쉰은 각종 모함을 받고 이사를 한 뒤 병에 걸렸다. 그러나 저우쭤런과 노부꼬의 일을 일기에 단 한글자도 적지 않았다. 이는 그가 죽고 난 수개월 뒤 필자가 그의 연대기를 저술하기 위해 그의 일기를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저우쭤런이 쉬서우창에게 한 해명은 매우 불만스럽다. 그는 루쉰과의 불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일은 1923년으로 루쉰과 사이가 틀어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명하지 않았던 내 태도를 글을 쓰면 분명히 밝혀질 것 같아 글로 쓰려고 했지만, 그런 것은 원래 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일에 관해서 나는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7월 17일 내 일기에 써 놓았던 글을 가위로 도려냈으며, 8월 2일 좐타골목으로 이사간 일, 다음해 6월 11일의 갈등만을 간단히 기록하며 쉬(徐), 장(張) 두 사람이 왔다는 말을 적었는데 모두 합해서 열 글자도 채 되지 않는다. 여기서 쉬(徐)는 쉬야오천(徐耀辰)이고 장(張)은 장펑쥐(張鳳擧)으로 둘 다 베이징대학의 교수이며 결코 무슨 ”남“이 아니다. 쉬지푸(許季弗)가 말한 것처럼 쉬군은 이 두 사람과 함께 이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사람은 비교적 '성실'하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니 어찌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루쉰과 저우쭤런 형제는 이 일에 대해서 매우 슬픔을 느꼈으며 두 사람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우애와 정 그리고 따뜻함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수족처럼 사랑하고, 같이 여행을 다니며 번역을 했고, 5․4운동 때는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항거를 했는데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으니 그야말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루쉰과 저우쭤런이 의절한 후, 두 사람은 각자 상하이에 있는 셋째 동생 저우젠런(周建人)에게 편지를 썼고, 저우젠런은 거침없이 루쉰의 편에 섰다. 저우젠런은 루쉰을 이해했다. 아마 하부토 노리꼬에 대해 불만이 있었거나 혹은 큰형 루쉰과 의견이 일치했을 수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루쉰과 저우쭤런의 불화는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본래 대가족간의 마찰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거기다가 노리꼬의 심한 낭비벽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저우지엔은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말했다.

 

"루쉰은 월급 삼백 위안 외에도 원고료와 강의료 등의 수입이 있었으며 저우쭤런도 비슷했다. 그 액수는 일반 직장인의 수입보다 10배 이상은 높았지만 항상 적자였고 돈이 모자랐다. 샤오싱(紹興)에서는 어머니가 집안을 관리했지만 베이징에 온 후에는 저우쭤런의 아내가 집안을 관리했다. 원래 일본여성은 온순하고 절약하기로 유명하다는데 저우쭤런의 아내는 예외였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었지만 기가 드세고 돈을 물 쓰듯 하였으며 집에는 관리인, 주방식모, 여러 명의 머슴과 청소, 빨래, 아이를 돌보는 여자시종 두서너 명도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노부꼬는 변덕이 심해 밥이 다 됐는데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상을 물려서 주방에서는 만두를 빚는 등의 일이 빈번했다. 루쉰은 매월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입을 모두 다 집에 쏟아부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저축해둔 돈까지 갖다 바쳤으며 어떤 땐 돈을 빌려야 했다. 심지어는 밤에 글을 쓸 때 담배와 간식을 살 돈도 없었다."

 

비록 저우쭤런의 생활이 좀 바듯하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저우쭤런은 그의 부인이 돈을 물 쓰듯 하는 것을 내버려뒀으며 감히 신경에 거슬린 말을 하지 못했다. 일찍이 신해혁명전후 저우쭤런이 식솔들을 이끌고 샤오싱(紹興)에 와서 살 때 부부싸움을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부인의 히스테리가 폭발하였고, 처남과 매부 그리고 처제가 그에게 삿대질하며 욕한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저우쭤런은 더 이상 부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으며 업신여김과 홀대를 받았다. 노부꼬는 평소 일본에 대해 말이 나오면 기가 하늘 끝까지 올랐지만 중일전쟁이라 말에서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저우쭤런은 그저 그가 편안하게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공간만을 원했기 때문에 그냥 집안을 시끄럽게 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으로 모두 참았다.

 저우쭤런과의 불화가 루쉰에게 준 상처는 매우 컸다. 그는 모욕과 억울함을 참고서 이사를 나갔다. 결혼의 비극과 형제의 불화는 루쉰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루쉰은 더욱 말수가 적어졌으며 가정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깨져버렸다.

침묵, 루쉰은 오랫동안 침묵하였다. 그의 마음은 할퀴고 찢겨져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신문화를 이끌어가던 맹장인 그에게 가정적인 불행은 그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 해 8월, 좐타골목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쉰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돈을 빌려 시싼탸오(西三條) 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로부터 그와 오랫동안 서로 우애가 두터웠던 저우쭤런과는 영원히 의절하게 되었다.

 

루쉰의 사랑을 경멸한 저우쭤런

어떤 이는 남자를 구제하는 것은 가끔 여성이라고 말한다. 루쉰은 저우쭤런의 의절에서 얻은 성과는 삶을 새롭게 선택했다는 것이다. 만약 동생과 의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여전히 늘 같은 곳에서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루쉰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삶에 용기가 생긴 것은 새로운 삶의 동반자를 선택한 데 있다. 결국 그는 이성의 사랑 속에서 승화되었다.

1925년 3월, 루쉰은 자신의 학생 쉬광핑(許廣平)을 알게 되었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쉬광핑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의 남은 반평생은 매우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한달 여 후, 루쉰과 쉬광핑은 사제지간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이때 루쉰은 이미 중년이었다. 강한 전통적 사고방식에 억눌려온 루쉰은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안고 과감하게 힘든 사랑에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다.

1926년 그가 남하한 것은 사실 사랑 때문이었다. 그들은 잠시 헤어져 있다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로 하였지만, 그의 사생활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예계에서는 그의 사생활을 둘러싸고 많은 조롱을 보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루쉰의 선택에 대해 저우쭤런이 시종일관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저우쭤런은 루쉰과 쉬광핑의 동거를 욕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자유와 건강한 성도덕을 항상 주장해왔던 저우쭤런이 이때는 뜻밖에도 자유연애를 용납하지 못했으니, 생각해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슈우(舒蕪)선생은 <루쉰에 대한 저우쭤런의 조롱>이란 글에서 저우쭤런이 사랑과 혼인문제에서 여러 차례 루쉰을 심하게 풍자했으며, 또한 <중년>, <지마를 기념하며>, <저우쭤런의 서신, 서언>, <질투가 심한 여성에 대해>, <책임> 등 자신의 글에서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루쉰의 다처(多妻) 및 첩 문제와 욕정 등을 조롱했는데 이러한 악담은 그의 일평생 거의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말년에 저우쭤런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국노로 몰린 자신을 변명할 때 자신의 두 형제는 전처를 버리고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그는 처를 돌보려고 했다는 둥의 말을 했다고 한다. 저우쭤런은 루쉰과 저우지엔런의 재혼을 '조강지처를 버린 행위'로 간주했던 것이다. 하부토 노리꼬 또한 루쉰과 쉬광핑의 동거를 다처(多妻)행위로 간주하였다. 루쉰은 <양지서(兩地書)>에서 노리꼬가 루쉰의 본처 주안(朱安)과 노모 앞에서 루쉰과 쉬광핑에 대해 악담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우쭤런 부부가 루쉰과 쉬광핑의 일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사실, 저우쭤런은 남녀애정문제에 매우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자유연애가 인류의 진화 과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가 왜 루쉰에 대해 그렇게도 가혹했을까? 첫 번째는 노리꼬의 일로 인한 원망 때문이었을 것이고 두 번째로는 루쉰의 조강지처인 주안의 입장에 서서 주안이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후자의 이유가 그의 사상과 거의 근접한 것 같다. 저우쭤런은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수 없으며, 만약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쉰이 남하하자 저우쭤런은 주안을 동정했으며, 그가 보기에 쉬광핑에 대한 루쉰의 감정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 욕정에 불과했다. 비록 이 일로 루쉰은 구제됐지만 주안을 희생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저우쭤런은 수많은 글 속에서 중국의 일부다처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