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쉬즈모와 세 명의 여인

simpara 2010. 5. 18. 18:35

쉬즈모(徐志摩:서지마)는 재능이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 이는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쉬즈모 외에도 풍류적이고 낭만적인 인간으로서의 쉬즈모 역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해진다. 하지만 그에게 무정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쉬즈모의 인생에서 만남은 많았지만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여인은 세 명이었다. 바로 장요우이(張幼儀:장유의), 린후이인(林徽因:임휘인), 루샤오만(陸小曼:육소만)이다.

 

 

                                                                쉬즈모와 장요우이

 

쉬즈모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고이 자랐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중매결혼이었다. 아내 이름은 장요우이((張幼儀)로, 결혼 당시 그녀는 전통적인 가정에서 교육받은 착한 딸이었다. 온순하고 선량한데다 어질기까지 한 장요우이는 시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쉬즈모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처럼 온순하고, 착한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그녀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비록 전통적인 집안에서 자랐지만 장요우이는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쉬즈모를 깊이 사랑했으며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됐으면 했기에 그를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그가 글을 쓸 때면 먹을 갈고 종이를 펴 주었다. 쉬즈모를 사랑했기에 그가 해외로 유학 갔을 때 문 밖을 나간 적이 없었던 장요우이는 고생도 마다않고 겁도 없이 멀리 쉬즈모를 찾아갈 정도였다. 이와 같은 대담함은 남자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해외에 유학을 간 쉬즈모는 견식이 넓어졌는데 어떤 측면에서 사상이 완전히 깨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의 부인이 온순하고 아름다우며 시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뭐라 해도 장요우이는 신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태생적으로 낭만적이었던 쉬즈모에게 시집 온 장요우이는 이미 비극적인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공항에 장요우이를 마중나간 쉬즈모는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구토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시 쉬즈모는 자신을 찾아 먼 거리도 마다않고 찾아온 부인에게 감동은커녕 위로의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촌스럽다고 비아냥거렸다. 장요우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안중에도 없는 쉬즈모를 보면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된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 무렵 린후이인과 그녀의 부친 린장민(林長民)이 영국에 왔다. 린후이인은 세상에 보기 드물게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으며, 신월파(新月派:중국의 현대문학 유파)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여류시인이었다. 일찍이 후스(胡適)로부터 중국 제일의 재원이라고 칭찬을 받은 그녀는 유명한 건축가이기도 해서 중국국기와 베이징천안문 인민영웅기념비의 설계에 참가하기도 했다. 린후이인은 영국, 미국 등지를 여러 해 유학했는데 그림도 잘 그렸다. 그런 그녀가 가는 곳이면 아무리 뛰어난 미녀도 그 빛을 잃었다.

피할 수 없었던 장요우이의 비극의 시작은 바로 쉬즈모가 린후이인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린후이인 

 

쉬즈모는 린후이인 부친 린장민의 친구였다. 린장민을 보러 온 쉬즈모는 우연히 린후이인을 보고 얼어붙었는데, 그야말로 혼이 육신을 빠져나간 듯 했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쉬즈모는 첫 눈에 반하게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식사 후, 쉬즈모는 린후이인에게 산책을 가자고 청했다. 원래는 미녀 앞에서 그의 재능을 뽐낼 요량으로 아무렇게나 시구를 읊기 시작했지만 뜻밖에 그가 한 구절을 읊으면 그녀가 다음 구절을 받으니 즐겁기 짝이 없었다. 이때 쉬즈모의 나이 24세로 유부남이었고, 린후이인은 겨우 17세였다. 한동안 그녀와 만난 쉬즈모는 이미 그녀에게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결국 오만한 시인이었던 그가 그녀에게 기회를 달라고 구걸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린후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쉬즈모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이후 린후이인을 얻을 생각을 굳힌 쉬즈모는 돌아가는 즉시 장요우이에게 이혼을 제기했다. 당시 이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며 오히려 첩을 두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쉬즈모는 린후이인처럼 뛰어난 여성이 결코 첩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혼에 대한 바람이 강렬했다. 그러나 이때 장요우이는 마침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애걸복걸하며 쉬즈모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그의 마음은 꿈쩍도 않았다.

린후이인 부녀가 먼저 귀국하자 쉬즈모는 이혼에 대한 생각이 더욱 확고해져 임신 중인 장요이를 타국에다 내팽개쳤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쉬즈모는 좋은 남자가 아니었으며, 최소한 책임감이 없는 남자였다. 한편 장요우이를 버린 쉬즈모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으나 뜻하지 않은 일로 어리벙벙해졌다. 바로 그가 사랑하는 린훼이인이 자신의 은사인 량치차오(粱啓超:양계초)의 아들 량쓰청(粱思成:양사성)과 정혼을 한 것이었다. 량치차오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큰 인물이다. 당시 량치차오는 중국 정치계, 문학계에서 명실상부한 일인자의 자리에 있었다. 누가 그의 아들의 정혼녀를 감히 탐낼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엄청난 희극이 아닌가? 더군다나 사람됨이 훌륭하고 믿음직하며 학식이 풍부했던 량쓰청은 결코 쉬즈모에 뒤지지 않았으니 린훼이인의 마음을 얻은 것이 당연했다.

그에 비해 쉬즈모는 확실히 비열했다. 두 사람이 정혼했음에도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녀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린후이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항상 친구의 예로써 그를 대했다. 하지만 량치차오는 그로 인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다. 명예와 위신이 드높은 자신의 집에 만약 정말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량쓰청과 며느리가 될 린후이인을 미국에 유학 보내 결혼시켰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지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쉬즈모와 린후이인의 관계를 왜곡하는데 이는 순전히 허구일 뿐이다. 린후이인이 쉬즈모를 재밌게 생각하긴 했으나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았다. 린후이인은 직설적인 성격이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진웨린(金岳霖:금악림;중국의 저명한 철학가)을 잘 알 것이다. 그는 유부녀인 린후이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린후이인도 자신이 남편과 진웨린을 모두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인 량쓰청에게 진웨린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량쓰청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화를 내지 않고 만약 그녀가 진웨린을 선택한다면 축복해주겠노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진웨린은 한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 후 친구로서 린후이인을 대했다. 이를 보아 그녀가 만약 쉬즈모를 좋아했다면 분명 숨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린훼이인을 잃은 쉬즈모는 하루 종일 술로 울적한 마음을 대신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내 삶에서 진정한 사랑을 끝까지 찾을 겁니다. /그녀를 얻으면 난 행복하지만 / 그녀를 얻지 못하면 내 운명이겠죠.”

 

 

                                                           쉬즈모와 루샤오만

 

바로 이때 한 아름다운 여성이 그의 삶에 뛰어든다. 영리하고 아름다기까지 한 이 여성의 이름은 루샤오만이다. 루샤오만은 어디 있던 눈에 확 띄는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쉬즈모를 만난 것은 아름다운 타락이었다. 왜냐하면 첫째는 그녀가 귀족출신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를 알기 전 쉬즈모가 이미 린후이인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린후이인과 비교하면 그저 두 번째일 수밖에 없다.

루샤오만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상하이 명문가의 규수로 귀족출신이었으며 한때 사교계를 뒤흔든 사교계의 꽃이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데다 외국어도 여러 개 구사할 줄 알았던 루샤오만은 '국제화'의 도시인 상하이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도 린훼이인처럼 그림에 능숙했다. 루샤오만의 그림은 그녀의 미모 외에 또 다른 볼거리인 셈이었다. 루샤오만이 19세 때, 상하이의 부잣집 도령님들과 고관의 자손들이 앞 다투어 중매장이를 보냈지만 명문가 출신에다 워낙 뛰어난 재능을 가진 루샤오만이었기에 그의 부친 눈에 그 누구도 차지 않았다. 그러다 루샤오만의 신랑으로 왕겅(王賡:왕갱)이 낙찰되었다. 왕겅의 집안은 사실 가난했지만, 왕겅 자신은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한 후 어느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니 젊은 나이에 출세했다고 할 수 있었다. 루샤오만의 부친은 왕겅이 장래가 매우 창창한 사람이라 보았고 자신의 딸을 그에게 선뜻 주었다. 당시 루샤오만의 결혼은 상하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거의 모든 신문이 톱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루샤오만은 총명하긴 했으나 결혼이란 부분이나 시대적인 의식에서는 한계가 있었는지 부친의 뜻에 따라 순순히 왕겅과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결혼 후 루샤오만은 왕겅의 성격이 자신과 전혀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 낭만적인 성격을 지닌 루샤오만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자였지만, 왕겅은 군인 특유의 엄숙함과 딱딱함으로 그녀의 기분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샤오만은 그럴 때면 매우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 그녀는 언젠가는 근사하고 유머를 갖추고 항상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왕겅은 그녀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왕겅이 집을 비울 때면 그녀는 무도회에 참석하였다. 바로 이때 루샤오만은 쉬즈모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쉬즈모는 실연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라 허전한 마음을 메울 것이 필요한 상태였고 루샤오만과의 만남으로 그야말로 마른 장작에 거센 불이 붙는 듯 했다. 그때부터 둘의 만남은 잦았다. 그런데 웃긴 건 쉬즈모가 왕겅과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흔한 말로 친구의 부인과는 놀아나지 말라고 하는데 쉬즈모에게는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왕겅이 집을 비우면 쉬즈모는 친한 벗을 찾는다는 구실로 그의 집에 와 루샤오만과 밀회를 즐겼으니 말이다.

둘은 서로 사랑했다. 한 명은 유부녀이고 또 한 명은 막 부인과 자식을 버린 사람이었으니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음탕한 남녀였다. 결국 루샤오만은 쉬즈모를 위해 용감하게 왕겅에게 이혼을 제기했다. 당시 여자가 남자에게 이혼을 제기하는 것은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려웠다. 물론 쉬즈모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한평생 린훼이인을 잊지 못했다. 이 점이 바로 쉬즈모에게 정이 많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이 많은 것과 정을 탐하는 것은 도덕적인 거리 외에도 감정에 주력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김용의 소설 <천룡팔부>의 단정순(段正淳)은 아름다운 여성들과 사랑을 했지만, 그는 그녀들을 모두 진심으로 대했고 그녀들은 그를 위해 주저 없이 죽음까지 불사했다. 이것을 정이 많은 것, 즉 다정(多情)이라 한다. 허나 <사조영웅전>의 구양극(歐陽克)은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면 가지려고 했지만, 일단 얻게 되면 하찮게 생각했다. 이것은 정을 탐하는 것이다. 대만 작가 리아오(李敖)는 연애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일찍이 수많은 미인과 연애를 했었는데, 한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그 중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했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성을 만날 때마다 모두 자신의 백퍼센트의 감정을 다 쏟아 부었다고 답했다. 아마도 정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든 백퍼센트의 사랑을 다 주고, 정을 탐하는 사람은 백퍼센트 중 몇 퍼센트를 각각 나누어서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쉬즈모는 루샤오만에게 백퍼센트의 사랑을 다 주었다.

아무튼 루샤오만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을 무렵, 쉬즈모는 유럽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됐다. 그것은 타고르의 조수가 보낸 편지였다. 당시 타고르는 유럽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쉬즈모를 초정한 것이었다. 타고르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다. 시인으로서 위대한 시인 타고르와 만난다는 게 어찌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쉬즈모는 이리저리 따져보다가 결국 유럽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타고르 조수의 실수로 쉬즈모는 결국 유럽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이때 중국에 있던 루샤오만이 한바탕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외국을 나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쉬즈모는 일정기간동안 유학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귀국한 쉬즈모는 루샤오만을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루샤오만은 세상 사람들에게 몹쓸 여자로 찍혀있었다. 그런 그녀를 당시 갑부였던 쉬즈모의 집안에서 어찌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는가? 쉬즈모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친한 벗 후스(胡適)를 대동하였다. 후스가 어떤 사람인가? 그 명성이 결코 루쉰에 뒤지지 않은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 쉬즈모의 부친은 후스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량치차오가 주례를 서 준다면 허락하겠노라 답했다. 량치차오는 워낙 유명한 사람인지라 그에게 주례를 부탁하는 건 일반인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지만, 마침 량치차오는 쉬즈모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량치차오는 쉬즈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거절했다. 어찌할 바 모른 쉬즈모는 또다시 후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하여 결국 량치차오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후스의 체면을 봐서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쉬즈모의 결혼에 량치차오가 주례를 서니 당연히 각계 명사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결혼 당일, 모든 것이 준비된 가운데 주례의 말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량치차오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신랑과 신부를 크게 호통 치기 시작했다. 먼저 루샤오만을 야단치고 나서 쉬즈모를 야단쳤다. 주례가 신랑, 신부를 욕하는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희한한 풍경이었다. 그런 행동은 혁신가인 량치차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식 후, 쉬즈모와 루샤오만은 꿀맛 같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몇 개월 후, 그의 부친이 루샤오만을 데리고 집으로 오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쉬즈모는 루샤오만을 데리고 집에 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리둥절해졌다. 장요우이가 여전히 자신의 본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귀국한 장요우이를 쉬즈모의 집안에서 본가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쉬즈모의 부모님에게는 장요우이가 진정한 며느리였다. 쉬즈모의 부친은 쉬즈모와 루샤오만을 앞에 두고 장요우이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이혼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느냐?” 쉬즈모의 부친은 장요우이가 울고불고하며 자신에게 일을 바르게 처리해달라고 간청할 줄 알았다. 쉬즈모도 놀라며 두려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요우이는 오히려 차분하게 이혼을 인정하며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장요우이의 넓은 마음은 쉬즈모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것을 보아 장요우이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장요우이는 쉬즈모를 잊기 위해 일에만 전념했고 결국 한 회사의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처음 쉬즈모의 집에 왔을 때 대도시에서 자란 루샤오만은 처음에는 시골생활에서 오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루샤오만은 결코 쉬씨 집안의 며느리로서 남부럽지 않을 자격을 갖춘 여성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와 시부모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었다. 루샤오만은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사교모임을 좋아했고 외국어도 몇 가지 할 줄 아는 신식 여성이었다. 귀족출신이었던 그녀는 아침 열 시에 일어나 하인들이 준비해둔 우유를 음미하며 하루를 시작했었는데 쉬씨 집안에 와서도 그런 습관을 바꿀 수 없었다. 쉬즈모의 부모 눈에 게으른 루샤오만은 부지런하고 착한 장요우이와 비교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쉬씨 집안에서는 루샤오만을 결코 자신의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쉬즈모의 모친이 병으로 누웠을 때 장요우이가 간병하도록 했다. 심지어 쉬즈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그녀를 못 오게 할 정도였다.

루샤오만과 쉬씨 집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쉬즈모는 그녀를 데리고 분가했고 본가에서는 그 후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은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쉬즈모는 원고료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 기간 동안 루샤오만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바로 사치와 낭비벽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쉬즈모는 돈을 그리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심과 위로인데도 루샤오만은 위로는커녕 오히려 돈을 물 쓰듯 했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쉬즈모는 루샤오만과 다투기 시작했다. 이럴 때 쉬즈모가 린훼이인이 어찌 생각나지 않겠는가?

당시 량쓰청과 이미 귀국해 동북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던 린후이인과 쉬즈모는 몇 차례 친구모임으로 만나게 됐는데, 쉬즈모는 여전히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허나 지난날의 따스함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쉬즈모는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한번은 린훼이인이 향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루샤오만과 싸운 쉬즈모가 린후이인을 문병 왔다. 그는 행복하고 따뜻한 린후이인의 가정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 다시 집으로 가 루샤오만과 화해하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루샤오만이 오히려 질투심으로 그를 몰아붙이자 화가 난 쉬즈모는 그 길로 집을 나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쉬즈모가 죽은 뒤 루샤오만은 슬픔에 젖어 몇 개월을 앓아누웠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난 루샤오만은 한평생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남은여생을 <쉬즈모전집>을 편찬하는데 주력했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쉬즈모는 중국시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의 '풍류와 낭만'은 사람들의 안주거리 화제로 남겨졌다. 쉬즈모의 인생에서 세여인 가운데 린후이린이 가장 아름다웠으며 매우 '총명'했다. 그리고 루샤오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물 만난 고기였지만 유독 쉬즈모의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장요우이는 전통적인 여성으로 쉬즈모의 매정함에서 강인함을 배워 더욱 아름답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