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천두슈(陳獨秀:진독수)와 네 명의 여인들

simpara 2010. 5. 1. 10:16

 

                                                            천두슈(陳獨秀:진독수)

 

중국문화 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신문화 운동을 일으켰던 천두슈(陳獨秀:진독수)의 일생에는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정치생애상의 굴곡에서든 사랑에서든 종잡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의 정치생애에 대해서는 역사가 시비를 가려 평가하겠지만 그의 사랑에 대해서는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천두슈는 결혼을 네 번 했고 사생활부분에 있어 진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와 네 명의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더러 복잡한 인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중매결혼의 쓴 맛

천두슈의 첫 번째 결혼은 당시 곧 사라지게 될 과거제도와 연관이 있다. 1896년, 18세였던 천두슈은 행운의 여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과거벼슬길이 싫었던 천두슈는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시험에 참가했는데, 그가 별 생각 없이 적은 글이 뜻밖에 일등을 차지하였다. 비록 천두슈 자신은 이 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는 그의 성공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때부터 제법 돈 있다 하는 부자집에서 뛰어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문지방이 닳도록 혼사를 넣으러 왔다. 그리고 서로 그를 사위를 삼고자 각축을 벌이던 중 결국 안칭(安慶)군영의 통령(統領:청나라 말기의 무관으로 오늘날의 여단장에 상당함)인 가오덩커(高登科)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통령이란 막강한 지위에다 지현(知縣:명청(明淸)대의 현의 일급 행정 수장)으로 있던 천두슈의 양부가 그의 덕을 볼 속셈이 더해져 천두슈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혼사가 정해져 가오덩커의 장녀 가오샤오란(高曉嵐)이 그의 신부가 됐다.

혼사를 정한 이듬해 19세의 천두슈는 가오샤오란과 결혼했다. 가문을 과시하기 위해 양가는 혼사를 매우 호화롭게 치렀으며, 가오덩커는 딸을 위해 혼수를 거창하게 준비하였다. 결혼식 날, 천두슈의 집에는 등과 비단띠로 집안을 장식했고 온 집안이 손님들로 바글바글 거렸다. 피리를 불어대고 폭죽을 터뜨리며 떠들썩한 가운데 신부의 꽃가마가 청나라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왔고 왁자지껄하고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천두슈는 결혼식을 올렸다. 가오샤오란은 그가 네 번의 혼인 가운데 유일하게 중매로 정식으로 맞이한 부인이자 엄숙하고 진지하게 치른 유일한 결혼식이었다. 신혼초의 즐거움이 천두슈와 가오샤오란 사이에 애정을 생기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틈을 생겼다. 가오샤오란이 천두슈와 결혼했을 때 21세로, 천두슈보다 3살이 많았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키가 컸으며 단정하고 예뻤지만 배운 게 없이 무식했으며 어릴 때부터 계모의 학대를 받아 성격이 괴팍했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전형적인 구식여자였다. 하지만 천두슈는 이미 뜻을 이뤄 이름을 날린데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성격이었다.

천두슈의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가오샤오란과 천두슈의 생각의 차이가 한 세기는 족히 넘었다”고 할 수 있다. 혼인 후 천두슈는 가오샤오란에게 여러 번 글을 가르치려 했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에게 서양구린내가 난다고 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천두슈를 가장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하루는 그가 <삼자경(三字經)>을 가지고 와 가오샤오란을 가르치려고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가 책을 빼앗아 갈가리 찢어버린 일이었다. 천두슈은 일본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훗날 성공하며 갚겠다고 부인의 금팔찌를 여비로 하려고 했지만 가오샤오란은 극구 반대를 했으며 온갖 방법으로 남편이 유학을 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러한 큰 갈등 속에서 이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애정이 없는 그들의 결혼은 1910년까지 간신히 지속되었다. 전통적인 형식으로 아내와 이별하지도 않고 이혼소송이란 새로운 방법도 없이 천두슈는 다른 여자와 동거함으로써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 마침표를 찍었다. 1913년, 천두슈는 '2차 혁명(위안스카이를 토벌하는 운동)'에 실패한 후 안칭을 떠나게 됐는데 그 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가오샤오란은 홀로 안칭에 있는 본가를 지키고 있었으니 부부관계는 사실상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1930년 7월까지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던 가오샤오란은 향년 53세로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처제에게로 옮긴 사랑의 불씨

1909년 7월, 천두슈와 가오샤오란의 결혼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개성이 뚜렷한 세련된 여성이 무덤 같이 적막한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가오샤오란의 동생 가오쥔만(高君曼)이었다. 스무 살을 조금 넘긴 가오쥔만은 늘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에 유행에 따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우아하고 세련된 신여성이었다. 당시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그녀는 생각이 트였고 지식도 많았다. 그런데 그 해 방학이 되자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언니를 보러간 것이었다. 그녀와 천두슈는 서로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난 듯 친근한 느낌이 들었고 비슷한 정서와 같은 생각들로 그들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명랑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고 시원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성격을 지닌 가오쥔만은 천두슈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천두슈의 박식함과 대범함은 가오쥔만의 마음을 흔들었고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부터 그들은 여러 이유를 핑계로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주고받고 토론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형부와 처제의 경계를 벗어나 어느 새 '사랑의 늪'에 빠졌다. 일의 진전이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반년이 채 되지 않아 그들은 동거에 이어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천두슈와 처제 가오쥔만의 도가 지나친 행동에 안칭(安慶)에 한바탕 파문이 일었다. 천두슈의 양부는 그에게 집안을 망하게 하는 자식이라며 마구 욕하며 부자관계를 끊고 그를 집안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장인 가오덩커는 노발대발하며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되먹지 못한 사위를 얻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으며 딸을 마구 때렸다. 하지만 집안과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천두슈와 가오쥔만은 아랑 곳 없이 서로의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결국 집 안 사람들과 등을 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안칭을 떠나 항저우로 갔고 2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 시간은 천두슈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10월, 우창(武昌)봉기의 포성이 그들의 행복한 꿈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급진적인 사상과 혁명을 지지하던 천두슈와 가오쥔만은 가슴을 뒤흔드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달콤하고 편안한 둥지를 뛰쳐나와 투쟁의 거센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1912년 초, 익히 천두슈의 명성을 듣고 존경해오던 안후이(安徽)의 도독 쑨위윈(孙毓筠)이 그를 도독부 사무장으로 초빙했다. 천두슈는 가오쥔만의 지지를 업고 고향 안칭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천두슈는 중국 정치무대 데뷔하여 재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와 가오쥔만과는 1909년에 동거 및 결혼해서 1930년에 헤어질 때까지 장장 20년 동안 5‧4운동, 중국공산당 창건, 국공합작, 4‧12 대학살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모진 비바람을 견뎌냈고, 가오쥔만은 언제나 그에 대한 마음이 변함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가오쥔만도 운명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언니의 전철을 밟아 가오쥔만 역시 불행히도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다. 1924년 쯤, 결혼의 비극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감정변화의 발단은 바로 천두슈의 불성실한 생활태도였다. 천두슈는 바람기가 다분했는데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가끔 난잡했다. 일찍이 베이징대학에서 학과장을 맡을 무렵 그는 자주 기생집에 갔었는데 그는 기생과 노는 일을 수치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오쥔만과의 결합은 재능과 미모가 만난 환상적인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사랑에 한결같지 못했다. 천두슈의 불성실함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가오쥔만은 불쾌한 마음에 자연히 뿌루퉁한 얼굴로 대하게 됐고 두 사람의 사랑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들은 1925년 별거를 시작했다가 결국 천두슈의 외도로 완전히 갈라섰다. 1930년 겨울, 가오쥔만은 두 아이를 데리고 아예 난징(南京)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처량하고 고독하게 살다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두슈를 만나지 못했는데 향년 46세였다.

 

살아생전에 감춰진 사랑

천두슈의 세 번째 결혼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다. 세 번째 부인 스즈잉(施芝英)은 천두슈의 애정생활에서 가장 신비한 여인이었다. 신비하다고 하는 것은 60년 뒤에야 천두슈와의 관계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스즈잉과 천두슈는 우연한 만남과 비밀스런 동거에서 부부생활까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따뜻한 가정을 꾸린 적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녀는 공개되지 않았던 천두슈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천두슈와 가오쥔만 사이의 감정적 공백을 메워주었다.

일의 자초지종은 '수수께끼 같은 실종사건'에서 비롯된다. 1926년 1월 말 어느 날,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맡고 있던 천두슈가 갑자기 실종되었다. 중앙기관은 허둥댔으며 동료들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여겼다. 장궈타오(張國燾)는 “형님이 살아있었다면 크게 될 수 있었는데 오늘 이리 될 줄 몰랐소.”라며 상심해했다. 그런데 거의 한 달 후 솜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목에 두른 천두슈가 홀연히 중앙기관의 동료들 앞에 나타났다. 모두들 놀라고 기뻐하며 그에게 어디 갔었는지, 왜 오랜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는지 연거푸 물었다. 그러자 천두슈는 병원에서 여의사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고 어물쩍 넘기며 비서처의 런줘민(任作民)에게 나중에 그의 '집'에 와도 된다고 덧붙여 말했다.

당시 그와 가오쥔만이 별거하고 있을 때이니 집이란 게 당연 원래 살던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천두슈는 한 달 동안 내내 여의사와 함께 있었던 것이었다. 1월 말, 감기 때문에 병원을 찾은 천두슈는 그곳에서 스즈잉이란 여의사를 알게 되었다. 원래 여색을 밝히는 그였는지라 스즈잉의 젊음과 미모 그리고 참한 모습에 이끌렸다. 후에 그는 자주 위장병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이 미모의 여의사를 청했다. 처음에 스즈잉은 천두슈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가 왕래를 하면서 그의 명성과 깊은 학문적 지식에 결국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하여 환자에서 애인으로, 존경에서 연애감정으로, 사랑에서 동거까지 발전하게 되었고 은둔자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1927년 3월에야 헤어졌는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천두슈와 헤어진 스즈잉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갈 곳이 없어진 천두슈는 중앙공산당 선전기관에 있는 사무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스즈잉과 천두슈의 관계는 천두슈가 죽은 뒤 30여 년 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제11차 삼중전체회의 이후 신장(新疆)에서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젊은이가 편지로 어머니는 천홍(陳虹)이고 외조모는 스즈잉인데 외조부가 바로 천두슈라고 밝혔다. 이 일은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증거도 없고 소문도 없었는데 천두슈의 외손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난데없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관련 조직의 조사를 거친 후에야 천두슈가 스즈잉과 동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으며 천홍은 천두슈의 딸이 아니라 스즈잉의 양녀임이 밝혀졌다. 1937년 8월, 천두슈가 감옥에서 출소하여 우한(武漢)으로 왔을 때 천홍과 천두슈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천홍은 그의 딸이라며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고 했고 천두슈는 그녀에게 그녀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 스즈잉의 양녀라고 알려주었다. 스즈잉은 천두슈의 네 명의 부인 가운데 유일하게 해방 후까지 산 사람이었다. 그녀는 1973년에 병사했다.

스즈잉과 천두슈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왜 헤어졌을까? 스즈잉은 죽을 때까지 함구하였고 아직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젊은 부인과의 마지막 사랑

천두슈가 네 번째 부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였다. 1927년 7월, 기세등등했던 대혁명은 장제스(蔣介石) 민국당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천두슈는 우익기회주의 노선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당의 비판을 받았으며 중앙공산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장제스가 3만 냥을 걸고 그를 현상 수배하였다. 1930년 겨울, 천두슈는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꾸고 상하이 웨저우루(岳州路) 쉐이싱리(水興里)에 몸을 숨겼다. 비좁은 허름한 골목의 주민들은 모두 배운 거 없이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천두슈는 후에 네 번째 부인이 되는 여공 판란전(潘蘭珍)을 만나게 된다. 판란전은 1908년생으로, 4살 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피난을 왔다. 부모님은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하루가 마치 일 년과도 같았다.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판란전은 하루하루 커갔고 열서너 살이 되자 담배공장에 들어갔다. 후에 부모님은 돈을 벌기위해 푸둥(浦東)으로 갔고 그녀 혼자 웨저우루 쉐이싱리 11번지에 살고 있었다.

같은 골목에 살았으니 두 사람은 자연히 자주 마주치게 됐고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건네게 됐으며 점차 친해졌다. 판란전은 이렇다 할 학력이 없었기 때문에 천두슈에게 자주 가르침을 구했고 열심히 지도를 받았다. 처음에 천두슈는 아버지처럼 그녀를 예뻐하고 관심을 가졌다. 총명했던 판란전은 빠른 속도로 글과 그림, 노래를 배웠다. 판란전은 체력이 떨어진데다 또 외부와 접촉을 하지 않아 돕는 사람이 없었던 천두슈를 위해 자주 식사거리를 사고 밥을 하고 빨래를 했다. 나중에는 마치 한 집안 사람처럼 같이 먹고 마시면서 더욱 친해졌다. 1930년 말, 진눈깨비가 내리는 늦은 밤 쉐싱리 11번지에 축포가 울리면서 늙은 신랑과 젊은 신부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해 천두슈의 나이 52세, 판란전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여기서 새겨볼 만한 일은 판란전이 당시 아직 그의 남편이 그 유명한 천두슈란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선량하고 충직한 성격의 판란전은 천두슈에 대한 사랑이 깊었으며 그에게만 충실했다. 어려운 생활은 그녀를 강인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1932년 10월 15일, 천두슈가 갑자기 체포되어 신분이 탄로 났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이나 후회 없이 천두슈와 같이 고락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천두슈는 체포된 후 난징 감옥에 갇혔다. 판란전은 천두슈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우여곡절 끝에 알아내고서 즉시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달려가 그를 면회했다. 천두슈은 체포된 후 언제나 사랑하는 판란전을 그리워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긴데 대해 죄책감이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그녀와 상봉하니 그 기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판란전은 남편의 반대에도 고집스레 난징에 남아 남편을 돌봐주려는 마음을 꺾지 않았다. 천두슈는 특별한 사람이었고 감옥에서도 특별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판란전은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했다. 그녀는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감옥에 있는 천두슈를 보살폈다. 천두슈는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는데, 5년이란 시간동안 판란전은 분주히 뛰어다니고 열심히 일을 하며 묵묵히 청춘을 바쳤고 아무런 원망도 없이 천두슈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해주었다. 그리고 5년이란 세월은 천두슈를 찾은 많은 친구들과 국민당의 고위간부 및 명사들을 보게 된 판란전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길고 긴 철창생활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千年長交頸, 歡慶不相忘(천년동안 오래토록 목을 부비며 함께 한 사랑을 서로 잊지 않네)”란 구절로 대신할 수 있다. 천두슈가 출소한 뒤 판란전은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켰고 후에 같이 쓰촨으로 갔다. 천두슈의 말년은 가난과 병으로 시달린 인생이었지만 판란전이 언제나 그의 곁에서 보살폈으니 불행한 말년에서 '유일한 행복'이었다.

1942년 5월 27일, 병상에 누워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던 천두슈는 외롭게 될 아내를 바라보자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는 당부했다. “오늘부로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고 자립해야만 하오.” 그리고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가장 아파하는 사람은 물론 고난을 같이하며 유일하게 의지했던 남편을 잃은 판란전이었다. 1946년, 판란전은 그가 남겨준 원고료와 원고, 그림 그리고 옛 도자기 5점 등을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와 소학교에서 일했다. 후에 누군가의 중매로 국민당 하급군관과 결혼했지만 불행히도 새신랑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9년 11월, 판란전이 자궁암으로 사망했는데 향년 50세였다.

 

 

 

                                                                                                                              출처: 文史天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