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소설

빨간 벌레(3)

simpara 2016. 8. 18. 23:43

사방이 온통 시뻘겋다. 방 안에 있는 것들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내 노트북과 휴대폰, 책상, 침대……모두가 다 빨갛게 보인다. 혹시 착시 현상인가? 나는 눈을 비벼댄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빨갛다. 다시 눈을 비벼댄다. 마치 눈을 짓뭉개버릴 듯 마구 비벼댄다. 눈앞이 갑자기 까매졌다가 다시 환해진다. 그 녀석이 보인다. 방 안 가득히 수천 마리, 수억 마리의 그 녀석이 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녀석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방 안이 온통 녀석으로 가득 차 있어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녀석을 밟고서라도 저 문 밖을 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녀석들의 눈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녀석의 탐욕스런 눈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 그 눈들이 마치 하나가 되어 점점 커진다. 날 향해 다가온다. 까맣고 번뜩이는 커다란 눈이 내 얼굴로 다가와 넌 내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싫어!”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눈을 떴다. 꿈이었다. 녀석의 꿈이었다. 음식을 마구 먹어대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그럴 리가? 며칠 동안 잠도 잘 수 없을 정도의 허기로 음식을 마구 먹어댔는데 어느 샌가 잠이 들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배 속에서 꿈틀대던 녀석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이 지금 잠을 자든 어쩌고 있든 일단 허기에 시달리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침대는 온통 과자 부스러기와 흘린 음식물로 엉망이었다. 일어나 방 안을 쓱 둘러보았다. 음식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어질러진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쓰레기들을 버리고 물휴지로 대충 방 안을 청소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다. 여전히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의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괜찮니?”

, 괜찮은 것 같아요.”

아이고, 다행이구나! 안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널 데리고 병원에 한 번 가보려고 왔더니 웬일인지 곤히 자고 있더구나. 한동안 자지 않고 먹기만 하더니……. 무척 곤하게 자기에 그냥 나왔어. 그동안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먹어대기만 할 땐 정말 어떻게 되지 않나 생각했단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정말……뭔 일이었다니……아무튼 괜찮다니 한 시름 놓겠네.”

그 후로 이틀이 지났다. 처음에는 밥을 먹기가 두려웠다. 다시 허기에 시달릴까 겁이 났다. 하지만 밥을 굶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굶는다는 건 허기에 시달린다는 거니까. 다행히 더 이상 내게 음식에 대한 집착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상적인 식습관으로 돌아왔다.

녀석이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정말 그냥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말 그런 거라면 녀석은 어디로 간 거지?

아직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피 같이 시뻘건 붉은 몸뚱어리와 끈적끈적한 더듬이……무엇보다도 날 먹이인 양 바라보며 내 몸을 죄어오는 듯했던 그 까맣고 번뜩이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녀석은 결코 날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놓아 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계속 집 안에 있다 보니 갑갑해졌다. 일단 지금은 녀석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 틈에 좁은 방 안에서 벗어나 바깥 공기를 좀 쐬어야겠다. 학교에나 가 볼까? 방학이지만 취업 공부를 한다고 친구들이 도서관에 있을지도 몰랐다.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언제 그 녀석이 불쑥 나타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그 동안 이 좁은 방 안에서 계속 녀석에서 시달리며 있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층계를 내려와 거실로 갔다. 엄마가 걸레질을 하다 날 쳐다보았다.

흐익!’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엄마의 눈 속에 잠시 동안 녀석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스쳐지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가는 거니? 아직 몸이 안 좋을 텐데 조금 더 쉬지 그러니.”

엄마가 걱정스레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 엄마의 걱정스런 눈빛 속에는 녀석의 흔적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거였다. 녀석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잠시 어떻게 됐나 보다.

,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엄마.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그런데 어디 가는 거니?”

, 도서관예요. 친구들 얼굴도 볼 겸.”

그래, 일찍 들어와라.”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녀석에게 시달리느라 고생해서 예민해진 건가……뒤통수에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왠지 머리가 찌릿찌릿해졌다.

 

오래간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마치 외국에 있는 양 거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낯설게 느껴졌다. 그나마 변함없이 익숙한 것은 여전히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바람이었다. 거리를 지나면서 문득 난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파란 신호등이 다 되간다며 울리는 경보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TV 아나운서의 목소리, 커피숍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 그런데 이런 소리 틈에서도 늘 도드라지게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왠지 오늘따라 웅웅 입에서만 맴돌듯 주위의 기계적 소음 속에 묻히어 거의 나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이 없는 거리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사람들 옆을 지나가면 나지막하게 서로 얘기하던 사람들도, 열심히 길을 재촉하며 걷던 사람들도,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도 일제히 나를 향해 흘끔 눈길을 던지며 재빨리 위에서 아래로 내 몸을 훑고 지나는 듯 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사람들의 시선으로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함을 느꼈다. 심지어는 신호등에 걸려 서 있던 버스 안의 사람들까지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봤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순간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눈들. 그리고 이상하게 번뜩이는 눈빛들. 마치 공기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감염되지 않은 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오싹해졌다.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서너 살쯤 된 한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꼬마는 걸어오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바로 앞에까지 왔을 때 꼬마는 순간 아이답지 않은, 전혀 귀염성이 없는 어른같은 비웃음을 띄며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 눈초리가 왠지 익숙했다. 순간 녀석의 번뜩이는 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식은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발길을 돌려 서둘러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을 나선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속에서 괜스레 나에 대한 비웃음이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조차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도대체 며칠사이, 내가 방 안에서 그 놈에게 시달리는 동안 이 바깥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결국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의 걱정스런 질문을 뒤로 한 채 갑갑한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뒤로 여러 번 외출을 하려고 했지만 수상쩍은 사람들의 시선과 어지럼증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배 속에서 내가 먹은 음식들을 아귀(餓鬼)처럼 먹어치우더니 어디로 간 걸까? 오히려 녀석의 기척이 사라진 것이 불안하기만 하다. 녀석이 그리 쉽게 날 놔 줄 리가 없다. 녀석의 그 번뜩이는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녀석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내게서 빠져나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사람들……! 그러고 보니 요즘 엄마, 아빠도 내게 아무런 반응도 없고 바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 다 이상하게 날 쳐다본다. 이것이 설마 녀석의 짓일까? 마치 바이러스처럼 녀석이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걸까? 그래, 전에 나갔을 때 그 꼬마아이……꼬마 녀석 답지 않게 비웃음과 함께 익숙한 눈초리로 날 봤었다. 그것은 분명 녀석의 눈초리와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도 녀석의 눈초리와 닮았다. 정말 녀석이 다른 사람들을 변하게 만든 것일까? 내 이상증상이 잠잠해진 사이 녀석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친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날 이상하게 쳐다본 것이었을까? 먹이를 노리는 그 녀석, 빨간 벌레의 번뜩이는 눈처럼?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를 잡고 속에 있는 걸 다 토해냈다.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물이 고스란히 다 나왔다. 전에 녀석이 내 배 속에 있을 때는 음식을 그리 많이 먹었어도 구토를 하니 쓴 물만 나오더니 말이다. 최소한 녀석은 내 배 안에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정말 어느 순간 내 배 속을 떠나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가기라도 한 걸까? 혹시 부모님에게 옮겨간 건가? 요 며칠 가끔 날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빛 속에 녀석의 눈빛이 겹쳐 보일 때가 있어 흠칫 놀라곤 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적어도 나와 같이 음식에 집착을 보이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요즘 내게 무관심한 듯 하면서도 가끔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아무튼 일단 녀석이 어디 있는지 빨리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그 녀석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