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령옥의 비극적인 인생(上)
완령옥(阮玲玉:루안링위)
완령옥(阮玲玉:롼링위)은 출중한 연기재능으로 중국무성영화시대에서 가장 높은 예술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대중들의 진심어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걸출한 이 여배우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1935년 봉건세력이 그녀의 결혼소송사건과 관련해 글을 올려 깊은 상처를 주고 더러운 오물로 그녀를 더럽혔다. 그녀는 심한 모욕을 받았고 '人言可畏(사람의 말이 무섭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의 사인이 정말 언론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유서가 모든 사람을 풀려나게 했으며, 그녀의 유서가 완령옥의 죽음을 신문기자와 할일 없는 소시민의 탓으로 돌리고 당사자들은 모두 아무런 관련이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역사자료가 공개됨으로써, 특히 노년에 접어든 당시 당사자들이 마음속에 있던 불편한 마음을 덜고자 그때의 기억을 얘기함에 따라 우리들은 완령옥의 죽음이 우리가 애초에 생각하듯 언론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두가 불과 25세의 그녀가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25세까지 29편의 영화를 찍었으며 중국의 무성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배우이자 그녀와 경쟁할 여배우도 없었던 시기에 완령옥은 왜 미련 없이 자신의 생명을 끊어야했을까? 왜 자신의 예술을 끝내야 했을까? 그럼, 그녀를 죽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들이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면 반드시 역사의 한 부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완령옥이 생활하던 1930년대로 돌아가 완령옥의 생애에 자리한 세 명의 남자를 만나야 한다.
1910년 상하이에서 중국영화사상 가장 이름을 떨친 여배우 완령옥이 태어났다. 완령옥의 본적은 광둥(廣東)으로 어린시절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張)씨 성을 가진 대부호의 집에 하녀로 가게 된 어머니를 따라가게 됐다. 완령옥은 바로 이 큰 저택의 후원에서 외로이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바로 그곳에서 그녀의 생애 첫 번째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악연이자, 그 남자의 출현으로 인해 완령옥의 죽음에 복선이 드리워진다.
장씨 집에는 네 명의 도련님이 있었다. 가장 어린 도련님이 18세인 장달민(張達民:장다민)으로 깨끗하게 생겼으며 항상 옷차림이 깔끔했다. 그 당시 상하이 말을 빌리자면 그는 샤오K였다. 샤오K가 무엇일까? 당시 상하이 사람들은 부잣집도련님을 샤오K라고 불렀다. 즉 할 일 없이 보내는 돈 있는 집안의 자제를 말한다. 당시 장달민은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있었다. 이때 완령옥도 어머니 곁에서 고이 자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남의 집 보모라는 사실을 항상 창피해했기 때문에 완령옥에게 그녀가 보모의 딸이라는 사실을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했다. 왜였을까? 남들에게 완령옥이 하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만약 사람들이 그녀의 신분을 안다면 하녀의 딸이라고 무시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그런 열등감이 완령옥의 비극을 몰고 왔으니 이것도 하나의 복선이 된다.
그럼, 다시 완령옥의 생애에서 첫 번째 남자인 장달민의 얘기로 돌아오자. 장달민은 비록 샤오K이긴 했으나 또한 그는 5․4운동의 영향을 받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보모의 딸을 무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5․4운동에서 평등의식을 주장하고 있었고 당시 18세의 사춘기였던 장달민에게 젊음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완령옥을 만났을 때 완령옥의 나이는 15세로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제법 처녀티가 완연했다.
장만옥(張曼玉:장만위)이 주연했던 《완령옥》이란 영화가 있다. 당시 누군가 장만옥에게 완령옥을 연기하면서 분명 그녀에 대해 연구를 한 적이 있을텐데 완령옥이란 인물의 특징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만옥은 완령옥에게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요염함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묘한 이끌림 때문이었는지 장씨 집안의 도련님이자 완령옥의 첫 번째 남자인 장달민은 완령옥에게 다가갔다. 장달민은 완령옥의 어머니가 보모를 하고 있어서 모녀의 생활이 그리 넉넉지 않다는 것을 구실로 자주 자신의 돈으로 두 모녀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두 모녀에게 다가간 장달민은 자신이 점점 완령옥에게 빠져든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때 완령옥은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때였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기뻐했다. 하녀의 딸이, 그것도 많은 여자들이 원하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시집가서 어엿한 안주인으로 지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완령옥의 어머니는 이 혼사를 적극 찬성하였다.
하지만 장씨 집안의 첫째 부인이자 장달민의 모친은 자신의 아들이 보모의 딸과 얽혀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둘의 관계를 매우 반대했다. 대부호의 집안이 어떻게 보잘 것 없는 보모의 딸을 부인으로 삼을 수 있냐는 생각이었다. 장달민의 모친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장달민은 그때 진심으로 완령옥과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에 완령옥에게 말했다. “좋아, 내가 부모님께 가서 담판을 짓고 올게.” 장달민은 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완령옥과 결혼하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굳은 얼굴로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얘기는 절대로 꺼내지 말거라.” 결국 어쩔 도리가 없자 장달민은 그의 어머니에게 동거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현재 1930년대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거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동거라는 말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단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930년대 당시에는 동거가 충격적인 단어가 아니었는지를 물으면 그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1930년대 상하이는 현대적인 여성이 종종 현대적인 남성과 동거하는 현대적인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1960년대 미국의 그린위치빌리지에서의 동거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 시기 동거는 다른 시대처럼 사람들의 도덕적인 질타를 받거나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령옥과 장달민은 동거를 하게 됐는데 동거할 당시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장달민은 짧았던 완령옥의 일생에서 그녀를 소유한 첫 번째 남자였다. 경제적으로 고된 생활은 완령옥을 일반 소녀보다도 훨씬 성숙되고 철이 들게 만들었지만, 경제적으로 고된 생활은 또한 완령옥을 너무나도 일찍 자신의 운명을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과 함께 엮이도록 만들었다. 16세에서 25세까지 거의 십 년이란 시간동안 그녀는 장달민에게 자신의 청춘과 피땀을 흘려 얻은 돈을 바쳤다. 그러나 장달민은 점점 더 검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고 옥죄였으며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다.
16세의 완령옥과 18.9세인 장달민은 직업도 없이 집에서 매달 집에서 부쳐주는 돈만으로 먹고 마시고 마작하며 춤을 추었다. 장달민은 특히 춤을 좋아했는데 그의 춤은 모두 아버지가 가르친 것이었다. 장달민은 완령옥을 자주 무도장으로 데리고 갔고 그 덕분에 완령옥은 춤을 잘 추게 되었으며 그녀 스스로도 춤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장달민의 형 장혜충(張慧冲:장후이충)이다. 만약 우리가 중국영화 백년사를 들춰보게 된다면 그가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장혜충은 초기 중국영화사를 연 창시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혜충의 사상 역시 매우 진보적이었다. 그는 동생인 장달민과 완령옥이 계속 그렇게 생활한다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완령옥에게 배우가 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여자아이에게 영화배우라는 것은 매우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리하여 완령옥은 16세 때 영화사에 들어가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이때 중국영화는 아직 무성영화시기였다.
상하이영화계의 발전은 완령옥을 길러냈고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도 낳게 만들었다. 1932년 완령옥이 영화 예술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을 때 1․28사변이 상하이에서 발발함에 따라 일본침략의 불씨가 상하이로 옮겨 붙었다. 이때 상하이의 수많은 거상(巨商)들이 안전을 위해 일제히 홍콩으로 피했다. 완령옥도 자신의 양녀와 장달민과 함께 홍콩에 왔다.
홍콩에서 완령옥은 그녀의 두 번째 남자인 당계산(唐季珊:탕지산)을 만난다. 그리고 이 중년남자의 출현은 다시 한번 완령옥을 사지로 내몰게 된다.
당계산은 당시 동남아에서 이름을 날리던 거상으로 찻잎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영화사는 그가 주식에 투자하도록 권했고, 당시 그는 바로 완령옥이 몸담고 있는 영화제작사인 렌화(聯華)사의 대주주였다. 영화사를 따라 홍콩으로 피난한 완령옥은 그녀의 두 번째 남자가 되는 당계산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의례적인 접대수준이었다. 처음에 완령옥은 당계산을 만난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계산은 완령옥을 만난 후 그녀를 그의 마음속에 담게 되었다.
당시 당계산에게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완령옥의 영화계 선배이자 중국무성영화사에서 유명한 여배우인 장직운(張織云:장즈윈)이었다. 장직운의 기질은 완령옥과 매우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로는 내뱉지 못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시 장직운은 영화를 그만두고 당계산과 동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당계산과 동거하고 있었을까? 광둥에 있는 당계산의 본집에는 부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계산은 왜 부인과 이혼을 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처가가 부잣집이어서 당계산이 사업을 크게 벌이고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대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처가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본부인과 이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 여자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당계산은 완령옥이 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이 바로 완령옥을 최고급이자 화려한 무도장으로 초대해 끊임없이 춤을 추게 하는 것이었다. 춤이란 원래 아주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접촉한다. 그렇게 춤을 추는 가운데 완령옥은 점차 당계산에게 끌렸다. 장달민과 당계산을 비교했을 때, 당계산은 사업에 성공한 중년남자이자 여자를 너무나 잘 아는 남자였다.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다만 여자를 잘 다루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는 여자에게 독(毒)이나 마찬가지이다. 불행인 것은 완령옥이 바로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그저 여자를 능숙하게 잘 다루는 당계산을 만났다는데 있다.
완령옥과 당계산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을 때 장직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완령옥에게 편지 한통을 썼다. “날 보면 당신의 미래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계산은 좋은 남자가 아니에요.” 그러나 완령옥에게는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완령옥은 장직운이 질투해서 자신과 당계산을 떼어놓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장직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당계산과 함께 지냈다.
완령옥과 당계산이 새로운 동거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장달민이 나타났다. 장달민은 완령옥의 곁에 당계산이 있는 것을 보고 악하고 검은 질투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완령옥의 생활에 다시 한번 풍파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풍파는 직접적으로 완령옥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장달민은 자포자기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실의에 빠져있는 동안 8년간 동거한 연인 완령옥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 남자는 자신보다 돈도 많고 실력도 있었다. 장달민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뒤엉켰다. 그리고 심란한 가운데 원망과 질투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 순간 장달만의 악한 면이 표출되었다. 그는 매우 비열한 방법으로 완령옥을 붙들어 맸다. 도련님 특유의 멋과 방탕함, 소시민적인 약삭빠름 그리고 건달 특유의 파렴치함을 모두 갖춘 장달민은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 되었다. 그는 완령옥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돈이라도 뜯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천위안이라는,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요구했다.
완령옥은 그저 조용히 넘어갈 생각으로 그에게 돈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당계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돈을 주려면 줘. 난 주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돈을 주다보면 끝이 없게 될 거야. 그는 건달이니까.” 당계산의 차가운 얼굴을 본 완령옥은 독한 맘을 먹고 장달민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푼도 주지 않겠어요.” 장달민은 줄곧 여리기만 했던 완령옥이 그렇게 단호한 태도로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말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좋아, 돈을 주지 않겠다면 당신의 과거를 폭로해버리겠어.” 결국 장달민은 완령옥이 당시 그의 집에 있었을 때 이런 저런 물건을 훔쳤고 이것을 당계산에게 주었다고 법원에 고소했으며 법원은 이 안건을 수리하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당계산도 법원에다 장달민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고소했다. 그렇다면 당계산은 장달민이 자신을 음해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했을까? 당계산은 완령옥에게 그녀가 장씨 집안의 물건을 그에게 준적이 없으며 서로가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라는 내용을 신문에 싣도록 설득하였다. 대외적인 평판이 중요하게 생각한 완령옥이었으나,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다투는 두 남자의 횡포로 결국 그들은 그녀를 팔아버렸다.
완령옥은 당계산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그의 제의에 동의하였고 신문의 공고란에 자신이 당계산과 동거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각각 독립해 있다는 내용을 실어 당계산의 결백을 증명해주었다. 하지만 이 무렵 당계산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 완령옥은 여자 특유의 직감으로 그를 미행하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새로운 여자는 양새진(梁賽珍:량싸이전)으로 당시 상해탄의 유명한 무희였다. 그녀는 춤을 잘 출 뿐만 아니라 예쁘장하게 생겨서 종종 영화에도 출연했기 때문에 완령옥과 같은 연예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계산이 자신의 친구나 마찬가지인 양새진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완령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