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이링과 쑤칭
장아이링(左)과 쑤칭(右)
장아이링(張愛領)과 쑤칭(蘇靑)은 모두 1940년대 상하이에서 이름을 떨치던 여류작가로,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함께 사람들에게 자주 거론된다. 실질적으로도 장아이링과 쑤칭 두 사람은 왕래가 잦았다. 장아이랑과 쑤칭이 서로 알게 된 것은 쑤칭이 1943년 가을 잡지 <천지(天地)>를 창간해 장아이링에게 원고를 청탁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장아이링은 이미 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매우 도도한 성격의 그녀는 원고를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했던 쑤칭은 원고청탁을 부탁하는 편지에 같은 여자라는 것을 이용해 “같은 여자로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고 썼다. 편지를 받아든 장아이링은 그 구절을 보고 웃기 시작했고 마음이 조금 열렸다. 게다가 사실 <천지>는 결코 만만한 하류잡지가 아니었다.
1945년 여름까지 장아이링은 <천지>에 수많은 산문을 발표하였다. 그중에는 쑤칭과 같은 제목으로 쓴 <여성을 논하다>라는 글이 있었다. 그 전에도 쑤칭과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문학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존중했다. 쑤칭은 잡지편집후기에서 <봉쇄>를 '최근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소설'이라고 칭하는 등 자주 장아이링의 작품을 칭찬하였다. 장아이링은 <쑤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쑤칭 글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문화수준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문학계에서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이용하여 쑤칭의 문학창작 수준과 가치를 인정한 것이었다. 장아이링의 이 말은 당시 쑤칭에 대해 분분했던 의견을 잠재웠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장아이링붐”이 일었을 때 쑤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자연히 따라붙었다.
쑤칭과 장아이링은 사회, 결혼, 여성, 가정 등의 문제에서 견해가 비슷했고, 다른 여러 문제에서도 서로를 잘 이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창작스타일과 성격은 매우 달랐다. 쑤칭의 작품은 내용을 중시하고 기교는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반면, 장아이링은 기교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내용과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하였다. 쑤칭의 작품 판매량은 장아이링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예술적 성과는 장아이링에게 미치지 못했다.
장아이링과 쑤칭이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기에 일찍이 기자가 사회와 가정문제에 대해 두 사람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도 있었다. 장아이링은 쑤칭과 옷가게에 간 것을 언급했다. 훗날, 쑤칭의 딸에 의하면 쑤칭과 장아이링이 서로 옷까지 바꿔 입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아이링과 쑤칭의 관계는 장아이링의 벗 옌잉(炎樱)의 관계만큼은 아니었다. 후란청이 장아이링과 교제하기 전 후란청이 쑤칭과 비교적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장아이링이 후란청과 교제하게 된 이후 어느 날 저녁, 장아이링이 쑤칭의 집에 왔다가 후란청이 그녀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서는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장아이링과 쑤칭은 일본점령지역에서 지나치게 활발하게 활동한 사실과 친일인물들과 자주 왕래한 사실 때문에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아마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인 변화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을 것이다.
해방초기, 장아이링은 홍콩에서 못다 이룬 공부를 완성한다는 핑계로 중국본토를 떠나 결국에는 미국에 갔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타국에서도 꽃을 피우려했던 바람은 죽을 때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말년에 그녀는 사회와 등진 채 은둔생활을 선택했으며 결국은 그녀를 모르는 머나먼 타국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던 쑤칭은 여러 번 정치적 핍박을 받았으며 감옥에까지 간 적이 있었다. 결국 말년에 쑤칭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