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웨린의 플라토닉 러브
진웨린(金岳霖)
오래 전, 칭화위안(淸華園, 지금의 청화대학)에 ‘칭화싼쑨(淸華三蓀, 칭화에 있는 세 명의 쑨씨)’이라 불리는 유명한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미혼이었다. 그 중 진룽쑨(金龍蓀)이라 불리는 철학자가 있었는데 바로 진웨린(金岳霖:금악림)이다.
진웨린은 중국 철학자이자 논리학자로, 철학과 논리학 강의, 연구에 종사했으며 현대논리를 최초로 중국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을 서로 결합시켜 독특한 철학체계를 세웠고 수많은 철학 및 논리학 인재를 배출해냈다.
그가 세운 철학체계 가운데는 존재론과 지식론을 포함한다. <논도(論道)>는 그의 존재론을 설명한 책이고 <지식론(知識論)>은 그의 지식론을 설명한 책으로 흔히 말하는 인식론이다. 그의 인식론은 자신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의 철학체계는 근대적일 뿐 아니라 민족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진웨린이 걸었던 철학의 길 및 그가 세운 철학체계는 중국철학을 연구하고, 추진하고, 발전시키는데 좋은 본보기를 제공하였다.
진웨린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건축학자이자 시인인 린후이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인의 응접실’을 사랑하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 중국에 특수한 사회집단, 즉 유럽과 미국 유학파인 지식인 집단이 있었다. 교양과 학문이 높았던 그들은 자주 함께 모여서 문학예술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문예살롱 가운데 린후이인 집의 응접실이 가장 인기 있었다.
린후이인은 아름답고 입담이 좋았다. 그녀의 집에는 늘 그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였다. 너무 유명했기 때문일까? 빙신(冰心)은 1933년 <대공보(大公報)> 문예 칼럼에 소설 <우리 부인의 응접실>을 발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에서 빙신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묘사한 저속하고 계산적이고 재미삼아 남자를 유혹하던 쿼(闊)부인이 린후이인을 빗대어 만든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해 막 산시(山西)에서 불당을 조사하고 베이핑(北平)으로 돌아온 린후이인의 반응은 매우 직접적이었다. 그녀는 산시에서 가져온 식초(醋: 질투를 뜻하기도 함)를 즉시 빙신에게 한 단지 보냈다.
빙신이 정말 린후이인을 조롱하려고 했든 안 했든 ‘부인의 응접실’은 명인과 학자들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옹호자들 가운데 가장 충실한 팬은 의심할 바 없이 진웨린이었다.
1914년 칭화대를 졸업한 진웨린은 영국과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후에 다시 근 십 년 동안 유럽 각국에서 유학했다. 당시 한때 유행하던 칭화-유학-칭화의 패턴에 따라 진웨린은 유럽에서 돌아온 뒤 칭화대학에서 발을 붙이고 철학교수가 되었다. 오랜 시간 유럽과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귀국 후의 생활도 이미 상당히 서구화돼 있었다. 그는 칭화대에 출근할 때 항상 양복에 가죽 구두를 입고 유행에 맞는 옷차림을 했다. 거기다 1미터 80이 넘는 큰 키를 가진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신사적인 면모가 한껏 드러났다. 그가 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여성들이 호감을 보였는데 그 중 중국 이름으로 리린(麗琳)이란 불리는 미국 여성이 먼 길도 마다 않고 그를 따라 베이핑까지 따라와 한동안 같이 동거했었다. 하지만 그 관계도 진웨린이 린후이인을 연모함에 따라 조용히 끝나버렸다.
일찍이 린후이인과 쉬즈모가 영국에서 만날 때 쉬즈모의 소개로 진웨린은 린후이인을 알게 됐었다. 쉬즈모가 린후이인에게 구애하기 위해 부인과 이혼할 때 진웨린이 증인 중의 한 사람이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훗날 쉬즈모와 루샤오만이 결혼할 때 그의 들러리까지 했었다.
논리학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진웨린의 존재는 ‘부인의 응접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더구나 유학경험과 공통적인 관심, 취미로 인해 진웨린은 빠르게 린후이인 부부와 친구가 되었다. 정이 깊어지자 진웨린은 심지어 이부자리와 세간들을 가져와 린후이인이 사는 베이쭝부(北總布)골목 3번지로 들어갔다. 진웨린은 말년에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1932년에서 1937년 여름까지 우리들은 모두 베이쭝부 골목에 살았었죠. 그들은 앞채에 살았고 난 뒤채에 살았습니다. ……아침을 제외한 점심, 저녁은 앞채로 가서 같이 먹었죠. 그런 생활이 ‘7‧7사변’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항일전쟁 이후에는 아예 그들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쓰촨에 있을 때는 여러 번 갔었죠. 한번은 한 해 동안 일을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줄곧 그들 집에서 보냈어요. 항일 전쟁 이후에 그들이 새 집에 들어갔을 때 나 역시 같이 살았다가 그들이 승원원(勝園院)으로 이사 가서야 따로 살게 됐죠.”
몇 십 년간 계속된 플라토닉 러브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서 그런지 진웨린과 린후이인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러다 쉬즈모가 죽은 뒤 두 사람의 감정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932년 6월 17일 해질 무렵, 량쓰청(梁思成)이 고대 건축을 조사하고 베이핑으로 돌아와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가 자신이 옛 절을 발견했다는 기쁜 소식을 린후이인에게 막 알려주려고 할 때 그녀가 슬픈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정말 괴로워요.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요. 나 어떡하면 좋죠?”
린후이인이 말하는 두 사람이란 바로 남편인 량쓰청과 진웨린이었다. 그녀의 고백은 량쓰청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훗날 량쓰청은 두 번째 부인에게 그날 일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후이인이 날 허수아비로 삼지 않고 솔직하고 진지하게 어린 동생이 힘든 일로 오빠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대해줘서 고마웠소. 난 후이인이 누구와 함께 살면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물었지. 내가 비록 문학, 예술면에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진웨린 같이 철학가적인 머리는 없었지.”
이튿날 이른 아침, 량쓰청은 자신이 고심한 결과를 린후이인에게 알려주었다.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이요. 만약 당신이 진형을 선택한다면 두 사람의 행복을 축복하겠소.” 량쓰청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모두 울었다. 린후이인이 량쓰청의 말을 진웨린에게 전해줬을 때 진웨린은 무척 감동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쓰청이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군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줄 수 없으니 내가 물러나는 게 옳겠지요.” 그 후 량쓰청은 진웨린이 하면 한다는 사람이고 린후이인도 진실한 사람임을 믿고 있었기에 다시는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진웨린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빙성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진웨린은 린후이인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었고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마음 넓은 량쓰청과 함께 린후이인을 존중해주고 보호하였다. 작가인 쉬루(徐魯)는 <철학가의 사랑>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린후이인에 대한 진웨린 선생의 사랑은 매우 고집스러웠다. 당시 린후이인이 폐병으로 몸이 안 좋았는데 진웨린 선생이 살뜰히 린후이인을 챙기며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것을 누군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케이크는 귀한 음식이었기에 하더먼(哈德門:중국 베이징 동남쪽에 있는 성문)에 있는 프랑스 제과점과 둥안(東安)시장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야 맛있는 케이크를 살 수 있었다.”
린후이인을 위해 평생 독신을 고집
진웨린 자신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동료의 결혼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가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을 때 새해나 설날 공휴일에 결혼 적령기이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자 동료를 자주 집으로 초정했다. 술잔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진웨린은 모두에게 빨리 결혼하라는 말을 수없이 하였다. 더구나 매우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내가 상을 주겠소.” 하지만 자신은 결혼할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마도 린후이인 외에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고 잔병이 많았던 린후이인었기에 진웨린에게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못했다. 1955년 4월 오랜 기간의 폐결핵으로 인해 린후이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겨우 51세였다. 린후이인의 죽음으로 진웨린의 찢어지는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추도회에서 그와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온 몸에 시적인 정취가 천령폭포처럼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영원토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사월이라네(一身詩意千尋瀑,萬古人間四月天).” ‘사월천(四月天)’은 린후이인의 시 가운데 명구절인 “당신은 세상의 봄 사월입니다(你是人間四月天)”에서 나온 것이다. 추도회 내내 진웨린의 눈물은 시종 마를 사이가 없었다.
추도회 이후, 진웨린은 린후이인의 죽음을 오랫동안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1955년 어느 날 봄 오전, 논리학자인 저우리취안(周禮全)이 베이징대학 철학대학에서 일을 보러온 김에 진웨린을 만났다. 저우리취안은 일찍이 실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진웨린의 충고로 겨우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진웨린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말했다. “리취안, 잠시만 기다리게, 할 말이 있어.” 그리고 사무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리취안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진 선생은 내게 사무실 문을 잠그라고 했죠. 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자코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린후이인이 떠나버렸어!’라며 엉엉 크게 울었죠. 그는 책상에 기댄 두 팔 속에 머리를 묻고서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울음을 그쳤습니다. 잠시 후 그가 눈물을 닦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멍한 눈빛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죠.”
린후인 없이 진웨린은 1980년대까지 쓸쓸히 혼자 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말년까지 보살핀 사람이 바로 량쓰청과 린후이인의 아들 량충제(梁從誡)였다. 량충제는 진웨린을 아버지처럼 대하여 ‘진 아버지’라고 불렀고 진웨린에게 많은 위안이 돼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 학자 천위(陳宇)가 린후이인의 작품 및 관련 역사 자료를 찾는 와중에 진웨린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천위는 그에게 린후이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진웨린은 한참을 침묵하다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모두 그녀와 직접 말해야 하는 것이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말할 기회가 없으니 말하고 싶지 않고 또 그런 말을 하기도 싫습니다!”
린후이인이 하늘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감동하여 눈물이 옷을 적셨을 것이다.
출처:天天新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