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세기의 사랑

simpara 2010. 7. 13. 19:40

 

                                                                              노년의 장쉐량과 자오이디

                                                                           

 

2001년 10월 15일, 중화민족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시안(西安)사건’의 주역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70여 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키다 떠난 부인 자오이디(趙一荻)가 죽은 지 십 여 개월 후에 조용히 부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장쉐량은 1901년 6월 3일 랴오닝성 타이안현(臺安縣)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쉐량, 자는 한칭(漢卿:한경), 호는 의암(毅庵)이다. 19세 때 사관훈련을 받았고 20세 때 육군소장이 됐으며 25세 때 중장으로 진급, 28세 때 동북변방 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30세 때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으로, 34세 때 육군 일급 상장이 되어 ‘젊은 지휘관’이란 별명을 얻었다.

자오이디는 홍콩에서 태어난 까닭에 샹성(香笙:향생)이란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자오이디는 어릴 때 줄곧 톈진에서 살았는데, 당시 톈진은 수많은 고관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자오이디의 부친은 자오칭화(趙慶華:조경화)로 톈진, 상하이 철도국 국장 및 교통 차관을 역임했었다. 자오칭화은 6남 4녀를 두었는데 딸 중에서 자오이디가 가장 어렸고 형제자매 중에서는 넷째였기 때문에 자오이디는 자오쓰(趙四)라고도 불렸다.

앞에서 소개했듯 자오이디에게는 언니가 세 명 있는데 1926년 전후로 성년이 된 언니들이 사교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톈진에서 가장 유명한 사교 장소는 채공관(蔡公館)이었다. 채공관의 주인(후에 장쉐량의 셋째 동생의 장인이 됨)은 일찍이 독일을 유학한 유학파 출신으로 자주 무도회를 열거나 영화를 상영했고 그럴 때면 톈진에서 내놔라 하는 집안의 자제들을 초대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자오이디는 호기심에 가끔 언니와 형부를 따라 무도회를 구경하러 갔다. 그리고 바로 그 채공관에서 열린 그녀의 생일 무도회에서 자오이디는 장쉐량과 처음 만났다.

1927년 여름, 자오이디 일가가 베이다이허(北戴河)로 피서를 갔는데 장쉐량도 마침 그곳에 휴양을 와 있었고 재회한 두 사람은 그때부터 갈수록 친해졌다. 톈진으로 돌아온 뒤 장쉐량과 자오이디는 같이 춤을 추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상류사회 무도회장에 장쉐량이 올 때면 자오이디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다 결국 자오이디의 부친인 자오칭화가 자오이디와 장쉐량의 관계를 알게 됐다. 자오칭화는 성격이 강직하여 관직에 있어도 항상 청렴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명성을 얻었었다. 그런데 노년에 들어서 자신이 아끼는 딸이 뜻밖에도 가정이 있는 장쉐량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화가 났다. 자오칭화는 크게 노해 자오이디에게 다시는 장쉐량을 만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믿을 만한 하인과 보모를 붙여 밤낮으로 자오이디를 감시하게 하고 혼자서 외출을 못하게 했다.

자오이디와 장쉐량은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자 편지로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가 쌓일수록 그들의 감정은 더욱 활활 불타올라 더 이상 서로 떨어질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8년 황구툰(皇姑屯)사건(※)으로 장쉐량의 부친이 일본군에 의해 죽자 장쉐량은 비밀리에 선양(沈陽)에 와 비통한 울분을 삼키면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일본군과 교전을 하는 와중에 자오이디가 선양에 오도록 서로 약속을 정했다.

1929년 10월 수확철을 맞을 무렵, 자오이디가 가출하여 기차에 홀로 몸을 싣고 선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북릉(北陵)에 별장을 마련해 장쉐량과 비밀리에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자오이디의 ‘실종’은 한때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앞서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만났을 때 장쉐량은 여러 가지를 고민한 후 자오이디에게 앞으로 동거하게 되면 부인으로서가 아닌 단지 자신의 비서 신분으로 나서게 될 거라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 당시 자오이디는 수락하며 말했다. “수많은 비웃음을 등에 짊어진 것은 다름 아니라 진실된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고 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불리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로부터 자오이디는 비서 자오쓰란 명칭이 생기게 됐다.

자오칭화는 자오이디가 장쉐량과 선양에서 동거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불같이 화내며 즉시 신문에 자신의 넷째 딸이 유부남과 도망가는 불효를 저질러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한 까닭에 오늘부로 부녀관계를 끊고 일체 왕래를 삼가며 다시는 관리가 되지 않겠다는 내용을 실었다. 하지만 부친의 강경한 반대와 여론의 압력에도 자오이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장쉐량을 시중드는 한편 공부에 매진하여 지식을 쌓으며 선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30년, 자오이디가 남자아이를 낳았고 뤼린(閭琳)이라 이름지었다.

자오이디가 장쉐량의 생활에 발을 들이면서 장쉐량, 부인 위펑즈, 장오이디 이렇게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삼각관계로 장쉐량은 부인 위펑즈를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자오이디의 헌신적인 사랑과 위펑즈의 지혜로움 그리고 장쉐량의 신중함으로 인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됐다.

위펑즈는 한동안의 관찰을 통해 자오이디가 장쉐량에게 온 것이 결코 재산이나 권력에 혹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서 한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대갓집 규수임에도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 있는 자오이디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고 참을 줄 알았으며 장쉐량에 대한 충성심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장쉐량과의 사랑의 도피행동으로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펑즈는 자오이디가 가진 수많은 재능들을 자신이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차츰 그녀를 받아들였다. 위펑즈는 자신이 집안 일을 관리하고 자오이디가 장쉐량을 도와 정무를 관리하며 두 사람이 합심하여 서로 도운다면 자신에 대한 장쉐량의 미안함 마음도 없어지고 일에 전념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북릉에서 수개월째 묵고 있던 자오이디를 본가로 불러들였다.

1934년 4월, 장제스(蔣介石) ․ 옌시산(閻錫山) ․ 펑위샹(馮玉祥)의 중원전쟁을 중재한 공으로 장쉐량은 국민정부의 육해공군 부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베이핑 순왕부에서 업무를 봤다. 그러나 베이핑에 온지 얼마 뒤 장쉐량은 감기로 입원을 하였고 위펑즈가 그를 보살피는 한편 자오이디는 순왕부에서 그를 대신해 관련 사무를 보고 일이 많지 않을 때면 늘 장쉐량을 보러 병원에 왔다. 하지만 9.18사변(※) 이후 동부 삼성(三省)의 함락과 열하성(熱河省) 방어전의 실패로 장쉐량과 자오이디는 뭇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됐고 결국 장쉐량은 해임되었다.

장쉐량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속을 터놓지 못해 모르핀을 주사하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의 정신도 피폐해져갔으며 고작 30여 세의 젊은이가 폭삭 늙은 듯 했다. 누렇게 뜬 얼굴과 마른 근육 그리고 병으로 비실대는 그에게서 지난 날 뛰어난 재능으로 군을 호령하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자오이디는 깊은 수심에 빠졌다. 위펑즈 역시 아편을 즐겨 흡입했기 때문에 그녀는 몰래 장쉐량의 친한 친구인 두안나(端納)와 쑹쯔원(宋子文)을 찾아가 장쉐량을 설득해달라고 청했다. 자오이디는 실의에 빠진 장쉐량에게 마약을 끊고 훗날을 위해 재기하도록 설득했다.

1933년 3월 12일, 장쉐량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동안 온순하기만 했던 자오이디가 권총을 들었다. 장쉐량이 마약을 완전히 끊도록 자오이디는 권총을 들고 창가로 가 성당의 탑꼭대기를 마주하고 경건하게 가슴에 십자를 긋고서 손을 들어 엄숙하게 말했다. “맹세합니다!”

치료가 시작되자 자오이디는 위병과 함께 총을 들고서 문 밖을 지켰다. 장쉐량의 치료를 맡은 독일의사는 치료할 때 몸을 긁지 못하도록 그의 손발을 의자에 단단히 묶었다. 창자가 끊어지고 배가 갈라지는 아픔으로 참을 수가 없을 때 장쉐량은 이로 옷을 꽉 물으며 신음하고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는데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자오이디 역시 그와 똑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방 안의 처참한 광경을 감히 보지 못한 채, 장쉐량의 비명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어 문을 등지고 귀를 틀어막았다. 자오이디는 몇 번이나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장쉐량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허리에 있는 권총이 손에 닿을 때면 그의 초췌한 모습과 함께 자신이 성당을 향해 한 맹세를 떠올리며 안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꼬박 칠일 밤낮동안 죽다 살아나는 환골탈태의 고통을 겪고서 장쉐량은 마침내 병을 뿌리 뽑았다. 한 달 후, 장쉐량의 친한 벗이자 주중 이탈리아 공사(公使)인 치아노가 다시 그를 만났을 때 놀라며 외쳤다.

“여어, 장군, 불과 한 달 만에 딴 사람이 됐구려!”

1936년 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자오이디는 줄곧 시안에 머무르며 장쉐량과 양후청(楊虎城)장군의 일을 도왔다.

시안사변 후 장제스는 장쉐량을 감금했다. 자오이디는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37년 1월 11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난징으로 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갔다. 거의 같은 시기 위펑즈는 장쉐량이 있는 펑화(奉化)로 가서 삼년 동안 그를 보살폈다. 그 때 장쉐량과 자오이디 사이에 낳은 아들인 뤼린이 아직 열 살이 채 되기 전이라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홍콩에는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다. 장쉐량과 함께 유폐생활을 준비하고 있던 자오이디는 아들을 데려 갈 수가 없어 깊이 생각한 끝에 가슴이 아프지만 아이를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누군가 아이를 해치거나 복잡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이를 외부의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아들과 헤어질 때 아직 열 살도 되지 않던 뤼린은 서럽게 울며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외치며 그녀의 다리를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자오이디는 슬픔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1940년, 장쉐량이 구이저우(貴州)로 이송되었고 자오이디가 그의 곁으로 왔다. 장쉐량은 무척 기뻐하며 모든 희망과 기쁨을 그녀에게 걸었고 자오이디 역시 모든 힘을 기울여 그를 위로하고 보살폈다. 장쉐량은 유폐생활에서 자주 영어잡지를 봤고 자오이디와 영어로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가 테니스, 낚시를 할 때면 항상 자오이디가 함께 했으며 장쉐량이 명나라 역사를 연구하거나 글을 쓸 때면 자오이디는 책을 사주거나 자료를 찾았다. 장쉐량은 시력이 좋지 않아 책을 읽으려면 힘이 들었는데 자오이디는 그런 그를 위해 책을 읽어 주었고 또한 골동품을 좋아하는 장쉐량을 위해 골동품을 감별하고 구입했으니 자오이디는 장쉐량의 가장 뛰어난 비서이자 동반자였다.

장쉐량이 타이완으로 온 뒤에도 언제나 그녀가 그의 곁에 있었다. 1940년에 미국으로 보내진 두 사람의 아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생활했으며, 성인이 된 뤼린은 천지탕(陳濟棠)의 조카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손자를 보기 위해 자오이디는 ‘특별허가’를 받아 미국에 갈 수 있었지만 삼일을 넘기기 전에 항상 장쉐량 곁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장쉐량에 대한 그녀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다.

1964년 7월 4일, 백발이 성성한 장쉐량과 자오이디가 타이베이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장쉐량이 64세, 자오이디가 51세로 두 사람이 세상과 격리된지 28년이 되는 해였다.

그런데 왜 이때야 결혼식을 올린 것일까? 그건 장쉐량의 종교적 신앙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자유의 상실과 기한 없는 감금생활로 장쉐량은 점차 세상일과 멀어져갔고 정식으로 세례를 받아 종교에 귀의하여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도가 세례를 받을 때 두 명의 부인을 둬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장쉐량은 위펑즈와 자오이디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장쉐량 자신이나 그의 친구들은 장쉐량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어려울 때 같이 고락을 함께했던 자오이디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장세량은 자오이디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위펑즈에게 편지로 자초지종 설명하고 이혼을 제기했다. 당시 위펑즈는 큰 딸과 사위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위펑즈는 본래 자오이디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고 특히 장쉐량이 유폐당한 뒤 20여 년 동안 자오이디가 줄곧 그의 곁에서 고락을 함께 한 것에 대해 매우 탄복하고 있었기에 장쉐량의 이혼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12명뿐이었지만 그래도 장췬(張群), 장다첸(張大千), 허스리(何世禮),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등 모두 타이완 나아가 중국 역사에 그 명성이 자자한 정계와 예술계의 거물들이었다. 이 12명의 하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랑과 신부가 같이 천천히 입장하였고 하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7월 21일, 타이완 <연합신문>에 장쉐량과 자오이디의 결혼 기사가 실렸다.

장제스의 부자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자 장쉐량 부부의 자유도 늘어났고 두 사람은 타이완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가서 정착했다.

2000년 6월 1일, 새 천년의 첫 번째 생일날 장쉐량은 또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생일이 지나고 6월 22일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11시 11분, 자오이디가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반려자를 잃은 장쉐량은 묵묵히 휠체어에 앉아 상심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백세 고령의 장쉐량은 자오이디 생전에 자주 다녔던 화교인 교회에도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도 부인이 생각나 장소를 바꿨는지도 몰랐다. 가끔 장쉐량은 불쑥 말했다. “마누라가 가 버렸어” 하지만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담담했으며 이 말 뒤에는 늘 “모두 하나님의 뜻이지”라고 말했다. 장쉐량은 말했다. “그녀는 날 가장 신경써줬고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좋았지.” 장쉐량에게 자오이디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2001년 10월 15일, 햇빛, 파도, 모래.......마치 안데르센의 인어아가씨처럼 자오이디가 이끈 것일까? 장쉐량은 또 다른 세계로 떠나버렸다.

 

 

※ 황구툰사건 : 봉천(奉天 : 펑톈)군벌 장쭤린(張作霖: 장쉐량의 부친)의 전용열차가 황구툰(皇姑屯)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폭발물로 파괴되는 바람에 장쭤린이 중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 이 사건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 시안사변 :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장출처: 亚商在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