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위안페이: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사별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는 중국근대사에서 가장 명망 높은 교육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청렴하고 정직했으며 강직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사람으로 마오쩌둥으로부터 ‘학계의 제1인자이자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라고 칭송받았다. 그의 자유로운 사상적 이념은 후대 중국교육에 대단히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자유로운 결혼 관념은 후세의 ‘남녀평등’사상의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살아생전 결혼을 세 번 했는데 전통혼례에서 동서양이 화합된 결혼까지 그리고 다시 결혼의 자유와 평등에까지 그의 결혼생활은 예사롭지 않은 스토리로 가득 차 있으며 또한 그의 결혼생활은 차이위안페이 본인의 사상적 변혁 및 중국근대사상의 변천을 보여준다.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
첫 번째 결혼 :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맞이한 신부
차이위안페이는 1868년 저장성(浙江省) 사오싱부(紹興府) 산인현(山陰縣)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는 옛날식 문인 교육을 받았다. 청(淸) 광서년(光緖年), 차이위안페이는 향시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봉해졌다. 1889년, 바로 과거에 급제한 해, 차이위안페이는 부모의 명으로 첫 번째 부인 왕자오(王昭:왕소)를 맞아들였다. 당시의 혼례는 순전히 중국전통방식에 따라 치렀다.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차이위안페이도 혼례 전 신부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왕자오는 저장성 콰이지(會稽) 출신으로 차이위안페이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깍듯이 대했다. 평소 결벽증이 있던 왕자오는 뭐든지 깨끗이 해야 직성이 풀렸으며 다른 사람이 의자나 식기, 옷, 수건 등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겉옷을 먼저 벗은 뒤 치마를 벗고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았다. 게다가 왕자오는 돈을 지나치게 아꼈다. 그러나 본래 호방하고 소소한 것에 얽매지 않는 차이위안페이는 왕자오가 자질구레한 일들에 신경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다투게 됐다.
처음 몇 년 간 차이위안페이는 소소한 것을 따지는 부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한데 부인을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혼인서약으로 인해 의무적으로 부인 곁에 머물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7년을 보낸 뒤 왕자오가 두 아이를 낳은 후에야 비로소 차츰 부부생활의 맛을 느끼게 됐다.
왕자오는 구식 여자로, 차이위안페이 앞에서 언제나 깍듯이 ‘나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차이위안페이는 자신에 대한 왕자오의 호칭을 가지고 시시때때로 그녀를 나무랐다. “앞으로 날 무슨 ‘나리’니 하고 부르지 마시오. 그리고 자신을 ‘쇤네’니 하는 따위의 말로 지칭하지 마시오. 그게 얼마나 듣기 싫은지 아시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왕자오는 다소곳이 말했다. “에휴, 이미 습관이 돼서 고쳐지지 않는걸요.”
1900년 전후, 서양의 민주사상 및 과학사상이 점점 더 중국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문화를 이끄는 최전선에 있던 차이위안페이에게 결혼과 가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차이위안페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여권사상의 기초를 다지게 되는 <부부공약>을 써서 남녀관계를 눈빛 교환, 육체적 교환, 마음의 교환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는 특히 마음의 교환을 중시했다. 마음의 교환이란 부부가 한마음으로 서로가 융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차이위안페이는 부인 왕자오와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벌어졌던 감정을 메우려고 노력했고 그의 가정은 더욱 화목해졌다.
그렇게 차이위안페이와 왕자오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친한 벗에게 “신혼 때보다 부부사이가 더 좋아졌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허약했던 왕자오가 그 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막 결혼생활의 달콤함을 맛본 차이위안베이 부부는 결국 이별해야만 했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 : 한 폭의 그림으로 맺은 인연
왕자오가 세상을 떠날 당시 차이위안페이의 나이 32세였다. 당시 차이위안페이는 장쑤성과 저장성 일대의 지식인들 사이에 이미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기에 왕자오가 죽자 중매장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차이위안페이와 왕자오가 늘 화목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왕자오가 죽자 차이위안페이는 부부간에 있었던 사소한 일도 함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매인이 귀찮게 하자 먹을 갈고 종이를 펴 붓을 들어 기이한 구혼광고를 적어 끊임없이 대문을 넘나드는 중매인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집 벽에 붙였다.
“첫째는 전족하지 않은 여성이어야 한다. 둘째, 글을 아는 여성이어야 한다. 셋째, 첩은 들이지 않는다. 넷째,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재혼할 수 있다. 다섯째, 서로 생각이 맞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다.”
‘전족하지 않은 발, 재혼, 이혼’이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단어가 한림이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 소식은 금방 퍼져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전통을 무시하고 삼강오륜에서 벗어난 차이위안페이의 글은 봉건적이고 케케묵은 낡은 풍습을 향해 도전장을 던진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중매인들은 더 이상 그의 대문을 밟지 않았다. 차이위안페이의 ‘구혼광고’는 사회를 향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자유결혼을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01년, 차이위안페이는 홀로 사오싱(紹興)을 떠나 위항(余杭)에 학교를 열었다. 거기서 그는 친구의 초대로 예쥔(葉君)의 저택에 손님으로 가게 됐다. 예쥔은 위항의 명문귀족이자 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많은 서화(書畵)를 소장하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자 예쥔은 차이위안페이에게 그림을 감상하자고 청했다. 차이위안페이는 당시 국학(國學)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긴 했으나 서예와 그림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예쥔은 원래 국학의 대가가 몇 마디 칭찬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차이위안페이는 한 폭의 세밀화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예쥔은 차이위안페이를 책상 앞으로 끌어당기며 웃으며 말했다.
“제민(孑民:차이위안페이의 호)형, 구혼광고를 붙인지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원하는 사람을 찾았소?”
“그건 거절의 의미였다는 걸 설마 예형이 모르지 않을텐데 어찌 그 일을 꺼내는 거요?”
차이위안페이가 예쥔에게 웃으며 반문했다.
“제민형이 아직 맘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났다니 제가 중매를 하죠.”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인가? 글을 아는 여성인가? 재혼할 수 있는 여성인가?”
그러고는 차이위안페이는 껄껄 웃었다.
예쥔은 차이위안페이가 원래 호방한 성격이라 농담이라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소개하는 여성이 그 세 가지 조건에 꼭 맞다고 할 순 없으나 분명 여자 중의 여자요.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그림을 팔아 동생을 부양했으니 어질다고 할 수 있으며, 17세 때 팔의 살점을 베어 아버지의 병을 고쳤으니 효녀라고 할 수 있는데다 그녀의 부친은 강서지방의 명사이니 명문집안이라고 할 수 있소. 다만……”
예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이위안페이가 자신이 보고 있었던 세밀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 그림의 화가요?”
예쥔은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만약 이 중매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기이한 인연이겠구려!”
차이위안페이가 또다시 껄껄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잠깐만, ‘다만’이후의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네.”
예쥔은 차이위안페이를 흘끔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다만 그녀가 전족을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소. 하지만 그녀가 나와 같은 고향사람인데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청순하고도 아름다운 여성이었소. 비록 경국지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지혜로운 보기 드문 여성이오.”
차이위안페이는 예쥔을 말을 다 듣고서 웃음기를 지우고 경건하게 몸을 일으켜 그 세밀화 앞에 다시 섰다. 아무런 제목이 없는 그 그림에는 꽃과 새가 그려져 있었는데 붓 터치가 거침없고 붓끝이 부드러우며 색이 산뜻하고 고상한 것이 고요하면서도 동적인 면이 있었으며 꽃과 새 그리고 하늘의 배치가 서로 잘 어울려 어찌 보면 조금은 슬퍼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그림을 응시하던 차이위안페이는 몸을 돌려 예쥔에게 물었다.
“황중위(黃仲玉:황종옥)? 중위가 그녀의 이름이오?”
예쥔은 차이위안페이를 한동안 응시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어떻소? 내가 나서야 할 때인 것 같군요”
그리하여 예쥔의 소개로 황중위를 알게 된 차이위안페이는 큰맘 먹고 그녀에게 구애하였고 그러다 자연히 결혼얘기가 오가게 됐다. 차이위안페이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지자 친구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으나 차이위안페이와 황중위는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적인 격식에 따르지 않는 혼례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1901년 11월 22일, 차이위안페이는 항저우(杭州) 서호에서 황중위와 두 번째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결혼은 동서양이 결합된 것으로 전통적인 혼례 때면 등장하던 세 명의 신을 그린 족자 대신 ‘공자(孔子)’란 두 글자만을 수놓은 붉은 천을 사용했으며 번거로운 혼례의식을 다 생략하고 작은 연설회로 인사를 대신했다.
차이위안페이의 혼례방식은 사실상 ‘자신’을 시작으로, ‘자신’을 예로써 사회풍조를 개혁하고 봉건적 풍습을 타파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중국혼례에서 여성의 속박을 푸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혼례방식은 차이위안페이 자신의 사상적 진보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당시 동서양 문화의 충돌 속에 생긴 중국의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사조의 부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1904년, 차이위안페이는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를 설립했으며, 1905년에는 쑨원이 세운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7년, 마흔에 다 된 차이위안페이는 4년간의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중국윤리학사>를 펴냈는데, 그 책에서 남녀평등, 결혼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처음 남성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한림학사였던 차이위안페이가 여성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투사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 황중위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20년 말, 차이위안페이는 유럽시찰을 위해 베이징 대학에서 파견되었다. 그가 유럽으로 출발하기 전 황중위는 병에 걸린 상태였지만 남편이 정해진 기일에 출발토록 극구 권했다. 그러나 차이위안페이가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부인의 부고 소식이 날라 왔다. 차이위안페이는 비통하고 애절한 마음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죽은 처 황중위를 추도하며>란 제목의 제문(祭文)을 적었다.
“아, 중위, 어찌 날 버리고 먼저 갔는가! 나와 결혼한 지 겨우 스무 해인데, 그 동안 당신은 아이들과, 집안 일로 힘들어했고 나 때문에 국내, 국외로 쫓아다녀야 했으며 가난함과 걱정으로 애를 태워야 했지. 서예와 그림,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당신이었지만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피로가 병이 되어 천수도 못 누렸구려. 오호, 내 죄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세 번째 결혼 : 스무 살의 차이를 훌쩍 뛰어넘은 제자와의 사랑
차이위안페이와 저우쥔
차이위안페이가 상처의 슬픔을 참으며 쓸쓸히 유럽교육을 시찰하고 있을 무렵 중국 내 정치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1921년 차이위안페이가 유럽에서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각 계 인사들이 일제히 그를 찾아와 인사를 했지만 차이위안페이는 혼란한 정국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었으며 다시 외국으로 나가 학문에 전력할 심산이었다. 그때 그의 옛 친구인 저장성 흥업은행의 은행장인 쉬신리우(徐新六)가 전화로 연회에 초대했고 차이위안페이는 흔쾌히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막상 연회에 도착하자 손님은 자신뿐이었다. 차이위안페이는 매우 의아해했지만 쉬신리우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술이 서너 잔 오간 후 쉬신리우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선생께 감히 한 마디만 여쭤보겠습니다. 황부인이 돌아가신 후 웨이롄(威廉:차이위안페이의 딸)이 따로 생활하기 때문에 부인께서 남기신 두 아드님을 보살필 사람이 없을 텐데요. 선생께서 다시 장가들 생각이 있으신지요?”
차이위안페이는 조금 놀랐지만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말년에 들어섰는데 장가는 무슨! 내 인생은 시든 거나 마찬가지요. 그저 속세와 멀어져 조용히 지내고 싶을 따름이오.”
“듣자하니 선생께서 다시 외국에 나가실거라고 하는데 두 아드님을 데리고 가실건지 아니면 고향으로 보내실 건지요?”
이 말을 듣자 차이위안페이는 흠칫 했다. 그랬다. 외국에 나가는 일은 이미 다 준비해놓았지만 두 아이에 대한 문제는 그리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하나 아니면 고향에 데려다 놓아야 하나?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차이위안페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쉬신리우가 또 말했다.
“입고, 먹고, 빨래하고 이리저리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러면 선생의 학문을 어떻게 해 나가겠습니까?”
입고, 먹고, 빨래라는 단어를 듣자 차이위안페이는 순간 근래에 자신의 시중을 드는 여학생 저우쥔(周峻)이 생각났다. ‘저우쥔이 내 학생이긴 하지만 또한 서른이 훌쩍 넘은 여성이고 줄곧 나를 보살피고 있는데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걸까? 저우쥔의 눈빛을 보면 내게 맘이 있는 것 같지만 여태껏 자신의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 어쩌면 부끄러워 차마 말을 하지 못했을 거야. 아이들이 저우쥔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그것도 복이지. 저우쥔은 총명하고 어질 뿐만 아니라 미모까지 겸비한 사람이 아닌가. 좀 있다가 다시 생각해보자……’ 여기까지 생각하자 차이위안페이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구려. 내 나이 벌써 쉰 넷으로 노인인데 괜히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순 없소. 허나 선생의 그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오!”
“선생님……”
쉬신리우가 다시 말을 꺼내려하자 차이위안페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정말, 정말 감사하오! 하지만 난 괜찮소.”
그러나 쉬신리우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쉬신리우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평소 차이위안페이의 됨됨이를 존경해왔으며 그가 고생스럽게 생활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부탁도 있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이 잘 되게 돕는 것도 좋은 일이기도 했다. 며칠 후 쉬신리우는 다시 차이위안페이와 약속을 잡아 결혼 얘기를 꺼냈다. 차이위안페이도 쉬신리우의 마음에 무척 감동을 받아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로 상대방이 그에 걸맞은 문화적 소양을 갖추어야 할 것, 둘째로 나이가 좀 있어야 할 것, 마지막으로 연구 조수로 도움이 될 만큼 영어를 잘 해야 할 것이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속으로 ‘이런 조건이면 스스로 물러나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쉬신리우가 흔쾌히 수락하였다.
“그건 문제 될 거 없지요. 오리혀 제가 몇 가지 조건을 덧붙이죠. 넷째 어질고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일 것, 다섯째 미모가 받쳐주고 친절하고 부지런할 것, 여섯째……”
“됐네, 됐어!
차이위안페이는 내심 놀랐지만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어느 지방 사람인가?”
“난징(南京)이 고향인데 어릴 때 푸양(富陽) 신덩(新登)과 항저우에서 자랐으며 시와 그림에 능하고 성격이 차분하고 어진 성품을 가졌는데 나이는 서른셋입니다. 선생께서도 아마 아실 겁니다. 그녀는 선생께서 설립한 애국여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제 어머니가 그녀의 집안과 각별해서 제게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아마 생각나실지도 모르겠네요. 예전에 베이징부(北京府)에서 그녀가 선생과 부인께 인사드린 적이 있는데, 선생께서 직접 그녀가 그린 미인도에 시를 써주기까지 했었죠!”
차이위안페이는 크게 놀라며 물었다.
“자네가 말한 사람의 성이 혹시 저우(周)인가?”
“그렇습니다. 이름은 저우쥔, 자(字)는 량하오(養浩)입니다. 십 수 년 동안 선생을 흠모하여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적 있으니 절개 있는 여자죠. 현재 상하이에 있는데 선생께서 괜찮으신다면 내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겠습니다.”
차이위안페이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치 그가 지내 온 과거가 필름같이 쭉 지나가듯 했다. 차이위안페이는 마음이 무척 복잡했지만 그래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쉬신리우가 중매를 선 이후 저우쥔은 더 이상 차이위안페이 곁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결혼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1923년 7월 10일 차이위안페이와 저우쥔은 마침내 소박하지만 신식 혼례를 올렸다. 이것이 차이위안페이의 세 번째 결혼이다.
이 결혼은 순전히 현대적, 문명적이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저우쥔이 투숙하는 호텔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와 쑤저우의 한 공원에서 같이 결혼사진을 찍었다. 당시 차이위안페이는 양복에 가죽구두를 신었고 저우쥔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결혼예식장에서 차이위안페이는 그와 저우쥔과의 만남을 사람들에게 얘기하였다.
결혼한 지 십일 후, 차이위안페이는 저우쥔과 자녀들을 데리고 상하이를 떠나 벨기에 브뤼셀로 갔다. 거기서 저우쥔과 아이들은 모두 국립미술대학에 들어가고 그는 <철학개요>를 집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매일 황혼 무렵이면 브뤼셀의 숲 오솔길에 한 젊은 부인과 나이 든 남편이 걸으며 시를 읊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널리 해외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차이위안페이는 결국 이렇듯 편안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게 됐다.
1940년 3월 5일, 저우쥔의 생일 이틀 전 차이위안페이가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