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스토리

선충원와 장자오허 : 행복 혹은 불행?

simpara 2010. 3. 19. 19:56

“여자는 시인의 시 안에서 영원히 안 늙지만 시인 자신은 늙어간다.......” 이 시 속의 여인이 현실에서 늙자 다른 사람이 '그'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병상의 그녀에게 물었다. “그를 아나요?” “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다시 말한다. “분명 그를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때는 2003년 봄 그녀의 나이 93세였다. 한 달 후 그녀는 인생의 긴 여정을 마쳤다. 눈을 감은 그 순간 그녀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녀를 위해 그토록 많은 글을 바치고 그녀와 55년을 함께 산 그 남자를!

 

                                              선충원과 장자오허

 

흑모란과 청개구리13호

장자오허(張兆和:장조화)와 선충원(沈從文:심종문)은 상하이 우송(吳淞)에 있는 중국공학(中國公學)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났으며 나이차는 여덟 살이었다. 선충원이 장자오허에게 구애하기 시작한 것은 1928년쯤부터였다. 그때 장자오허는 18살로 대학 2학년생이었다. 피부가 약간 까무잡잡하고 활달하고 예뻤던 장자오허는 “흑모란”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많은 남학생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다. 장자오허는 남학생들이 보내 온 편지를 “청개구리1호, 청개구리2호”라는 명칭을 붙여 보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자오허는 선충원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편지의 첫 구절이 바로 “내가 어째서 갑자기 널 사랑하게 됐는지 알 수가 없구나”였다. 장자오허는 약간 당황했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청개구리13호”라는 번호를 매기고 보관하였다.

그 후 그는 자존심도 버리고 계속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노예가 된들 대수겠니? 가축이 되더라도 온 몸이 갈가리 찢겨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선충원은 때로는 회유를, 때로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1930년7월8일 장자오허가는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가 롄(그녀의 친구)에게 만약 그의 구애가 실패한다면 두 가지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을 채찍질해서 발전하는 길이지만 자신은 그 길을 가지 않을 거라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다시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살이고 다른 하나에 대해서 그는 우물쭈물 얼버무리며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난 어쨌든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일까? 나와 함께 동반자살이라도 할 셈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정말 철부지같은 짓이다! 허나 난 겁나지 않는다!”

죽느니 사느니 하며 소란을 떠는 선충원의 사랑은 학교에 파란을 몰고 왔으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근댔다. 결국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장자오허는 교장인 후스(胡適)를 찾아가 얘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여름날 오후, 마침내 그녀는 교장 후스를 찾아갔다. 후스는 일찌감치 두 사람을 맺어줄 심산이었기 때문에 선충원이 세상에 드문 천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녀에게 그와 동향으로서 장자오허의 부친에게 중매를 넣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치며 “선충원이 죽어도 자네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장자오허는 전혀 누그러지는 기세 없이 내뱉었다. “난 죽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후스는 놀라는 한편 안타까웠다. 그 일 이후, 후스는 선충원에게 편지를 썼다. “장자오허는 자네를 이해하지 못하네. 그리고 자네의 사랑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네. 상대방을 잘못 고른 것 같군……그녀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적네…….”

후에 칭다오(靑島)대학에 근무를 하게 된 선충원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32년 여름방학, 그리움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선충원이 그의 마음속의 “여신”을 만나기 위해 쑤저우(蘇州)에 도착했다.

장자오허의 가족들은 장자오허보다 문학계의 천재인 그를 빨리 받아들였고 장자오허의 바위 같은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훗날 마음이 흔들린 것에 대해 그녀는 말했다. “그가 편지를 너무 잘 썼기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 과연 선충원의 글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뼛속까지 선량한 선충원 자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를 그래도 계속해서 찍어대던 그의 고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명성, 후스와 가족들의 인정 때문이었을까?

1933년, 선충원은 칭다오대학의 교직을 사표내고 9월9일 베이징 중앙공원에서 결혼을 올렸다. 그러나 정식 예식은 없었으며 신혼방도 지인이 보내준 백자도(百子图)만이 경사스러움을 약간 보태줄 뿐 매우 초라했지만 선충원의 입장에서는 촌뜨기가 결국 사랑의 “달콤한 술”을 마시게 된 셈이었다.

 

결혼생활 그리고 외도

그렇게 바라던 장자오허를 맞이하게 됐으니 선충원은 당연히 매우 흡족해 했으며 장자오허에 대한 구애와 사랑은 그의 창작욕을 자극시켰다. “당신이 있기에 나는 한평생 수없이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소!”

그러나 처음엔  장자오허는 표가 날 정도로 선충원을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쓴 글도 읽기 싫어할 정도였으며 선충원이 자주 코피를 흘리는 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창피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드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셈이었다. 장씨 집안의 셋째 딸인 장자오허는 원래 그녀가 즐겨 입는 푸른 중국식 옷처럼 특별히 영민하지 않았고 사치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일단 한 남자의 아내가 되자 더욱 잇속을 따졌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충원과 몇몇 동료들이 같이 쿤밍(昆明)으로 갔다. 당시 장자오허는 따라가지 않았는데 떨어져 있는 와중에 선충원은 평소보다 더 자주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가끔 편지를 보낼 뿐이었다. 남편이 타지에 있는 경우 아내들은 대개 외도를 할까 걱정을 하는 법인데, 여기서 우리들은 사람들이 숭배해 마지않은 문학가가 장자오허의 마음속에는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자오허는 각종 이유를 대며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피했다. 선충원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는 내 편지를 더 사랑하는 것 같군.” 그러다 1938년 말에야 비로소 장자오허는 두 아들인 룽룽과 후후를 데리고 쿤밍으로 왔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감을 둔 그녀는 집을 청궁(呈貢)에 마련하였다. 결국 쿤밍 서남연대에 교직을 맡았던 선충원은 주말마다 기차를 한 시간 타고 다시 십리를 와야 청궁현의 남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자오허를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은 틀림없었지만 선충원은 스트레스를 느꼈다. 장자오허가 항상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을 해도 부인의 눈빛을 보면 그는 항상 허둥대고 경계심이 들었다. 장자오허가 말없이 부드럽게 대할수록 그는 더욱 스트레스가 커지는 듯 했다. 그는 편안함이 필요했고 다른 사람의 선망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선충원의 일생에 스캔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 스캔들의 대상은 문학여성 가오칭쯔(高青子)였다.

가오칭쯔는 선충원과 같은 고향사람으로 내각총리 시웅시링(熊希齡)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선충원이 일적으로 시웅시링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은 집에 없고 가오칭쯔가 그를 맞이했는데 서로 좋은 인상을 주고받았다. 한 달 후 다시 만났을 때 가오칭쯔는 특별히 녹색바탕에 작은 노란 꽃이 있으며 옷소매 끝이 자주색인 겉옷을 입고 있었다. 바로 선충원의 소설<네번째(第四)>에서 여주인공의 옷차림을 흉내 낸 것이지만, 그 방법은 선충원의 또 다른 소설<등>의 줄거리를 본 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재치는 자연히 감정이 풍부한 선충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후의 일들은 가오칭쯔의 소설<자줏빛(紫)>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녀의 소설 <자줏빛>은 1935년 말 선충원이 편집장으로 있던 <국문주보(國聞週報)>에 실렸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약혼자가 있지만 쉬안뤄(璇若)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두 여자 사이에서의 방황과 갈등을 묘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주인공이 상하이, 칭다오, 베이징 등을 전전하는 모습이 선충원과 딱 들어맞는 것을 증거로 내세운다.

아무튼 이러한 것들이 선충원과 가오칭쯔 사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그도 자신이 “피가 뜨겁고 환상이 많은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었다. 선충원은 솔직하게 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장자오는 놀라는 한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아들 룽룽이 막 태어난 때라 장자오허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화가 난 김에 그 길로 쑤저우에 있는 친정집으로 가버렸다.

가오칭쯔는 선충원의 소개로 서남연대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불륜의 감정이란 언젠가는 시들고 이성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 법이다. 1942년, 가오칭쯔이 그와 이별했다. 들리는 말에 그녀가 한 기술자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50여 년이 지난 이후, 장자오허가 당시 일에 대해, 반반한 얼굴의 가오칭쯔가 자신의 가정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을 막기 위해 친한 친구에게 가오칭쯔의 만남을 주선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6년 선충원은 십여 년간 자신의 감정을 종결짓는, 그리고 부인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결혼13주년을 기념해 동명소설<주부>를 썼다.

 

냉정, 냉담 혹은 냉혹?

전쟁이 끝날 무렵 선충원 일가는 쿤밍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48년3월, 한 잡지에 그를 혹평한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한 편에서는 그를 '빌어먹는 문인식객', '노예주의자'라고 비판했으며 또 다른 글에서는 그의 작품을 '퇴폐적인 문예'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분명 선충원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우울증을 앓게 된 선충원에게 친구들이 칭화위안(淸華園)에서 두 달간 요양을 가도록 권했다. 하지만 장자오허는 그와 같이 가지도 않고 병문안도 가지 않은 채 편지만 주고받았다.

한번은 선충원이 장자오허의 편지 끝에 글을 써서 다시 붙여서 보냈는데 매우 어두운 정서를 담고 있었다. 그 중 한 단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내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휴식을 주고 깨우지 않으면 그만이오. 내가 말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소. 내가 결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친구는 없소. 여보, 편지를 쓸 필요 없소. 난 보잘 것 없으니까. 모든 일이 그렇지. 생명이란 그런 것이겠지. 모든 것이 나와는 동떨어져 있소. 여기 사람들은 날 마치 생매장당한 것처럼 대하오.” 그러나 장자오허는 여전히 답장만 보낼 뿐 그를 보러오지 않았다. 그가 있는 칭화위안이 그리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충원의 우울증이 다 치유되고 몇 해가 흘렀다. 베이징에서 아내와 서로 떨어 지내던 선충원은 매일 밤 장자오허에게 가서 밥을 먹고 다음날 먹을 아침과 점심거리를 가지고 왔다. 베이징의 매서운 겨울날 선충원이 홀로 처량하게 음식을 먹으며 연구를 했을 광경을 상상해보면 장자오허가 냉정함에서 냉담으로 심지어 냉혹할 정도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자오허가 실로 어릴 때부터 냉혹한 구석이 있었을까? 진안핑(金安平)<허페이(合肥)의 네자매>란 책 속에 그녀가 어린 시절 때 작은 의자로 흙인형을 산산히 부수어 놓았으며, 또 맨손으로 헝겊인형을 갈가리 찢어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과장된 부분이 부모가 장자오허에게 고무인형을 사주며 ‘이번에는 괜찮겠지’하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바늘쌈지에서 가위를 찾아 난도질을 해놨다는 대목이다. 장자오허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침묵에는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반항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집에서 외롭고 기댈 곳이 없던 선충원은 당시 승승장구를 하던 딩링(丁玲)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일찍이 그녀와 매우 친했고 또 많은 도움을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 후후가 그와 같이 동행했지만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외롭고 기댈 곳 없이 의기소침해 있던 선충원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는 집에서 손목과 목을 긋고 기름을 마시고 완전히 살 의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이런 그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집에 손님으로 있던 사촌동생이 다행히 반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선충원을 발견하였다.

장자오허는 결코 선충원의 진정한 지기가 되지 못했다. 그의 명성이 자자했을 때 그녀는 자주 그의 어법을 고치려고 했지만 그녀가 고치게 되면 그만의 특유의 문장이 사라지기 때문에 선충원은 장자오허가 자신의 글을 못 보게 했다. 그가 절필을 했을 땐 그녀는 선충원이 창작에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오해하여 그가 입도 방긋 못할 정도로 호되게 비판하였다.

 

첫 편지에서 첫 편지까지

 

 

어찌됐든 선충원이 편지를 쓴 대상은 장자오허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가 이해했든 동정했든 선충원은 그녀를 '보배'라 불렀으며 그녀는 여전히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지지대였기 때문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장자오허는 언제나 선충원의 마음속의 여신이었다. 장윈허(張允和)가 <첫 편지에서 첫 편지까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1969년 선충원이 하방(下放:당원이나 공무원의 관료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을 일정한 기간 동안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서 노동에 종사하게 한 운동)전 날, 어지러운 방 안에 서서 불룩한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편지를 꺼내어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셋째 누나가 내게 준 첫 편지예요.” 그는 편지를 접으며 매우 수줍고도 따뜻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는데 일흔이 다 되가는 노인이 마치 어린애처럼 울었다.’

선충원이 1985년 인터뷰를 했을 때 여기자가 “문화혁명”때 그가 여자 화장실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를 감싸 안고서 “정말 고생이 많았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83세이나 된 그가 뜻밖에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어느 사람이 당시 상황을 다음과 묘사했다. “마치 설움을 당한 아이처럼 울더군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계속해서 울었어요.” 어쩌면 집에서 장자오허가 그에게 맘껏 울 수 있도록 한 번 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낯선 여자의 팔 안에서 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외부환경이 변하자 그들의 상황도 호전되었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 작가 룽둥(龍冬)이 선충원과 관련된 기억에서, 선충원이 노인 두 명과 대화할 때 한쪽 다리를 힘겹게 다른 다리에 포개면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다리를 다시 내려놨다는 얘기를 했었다. 또한 그는 말했다. “산책할 때 선선생이 외투 단추를 풀어헤치자 감기 걸리까봐 걱정된 부인이 재빨리 다시 외투를 여며줬죠. 허나 선선생은 고집스레 다시 외투를 열어젖혔죠.” 바로 이런 '고집과 평화'의 조화 속에 편지 속의 사랑이 현실생활로 들어왔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 속에서 서로 의지했다고 정신적으로 이해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장자오허가 1995년 <충원가서(從文家書)>를 출판했을 때 <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60여 년이 지났다. 책상 위의 글을 마주대하니 꿈을 꾸는 중인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읽는 중인지 알 수 없다. 그와 함께 한 삶이 행복인가 불행인가? 잘 모르겠다. 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후에 조금 이해하긴 했지만 진정 그의 사람됨과 평생 받았던 중압감을 이해한 것은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하는 지금이다…….”

세상의 갖은 풍파를 거친 뒤의 이해가 그녀에게 행복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녀의 안간힘과 괴로움을 선충원이 이해한 것일까? 어찌됐든 그들은 각자 환상을 남겨두었고 서로 의지하며 함께 긴 인생을 걸어왔으니, 그것도 일종의 행복일 것이다!

 

 

 

 

 

                                                                                                                       출처: 金羊网-新快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