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리쥔(鄧麗君:등려군)의 연인들
덩리쥔(鄧麗君:등려군)
첫사랑--린젠파(林振發:임진발)
덩리쥔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8살 때 첫사랑을 했으며 상대는 청년실업가인 린젠파라고 한다. 린젠파는 덩리쥔보다 8살 많았다. 1971년 두 사람은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덩리쥔은 승마에 빠져있었는데 린젠파는 꽤 괜찮은 아마추어 기수였다. 그는 덩리쥔에게 세심한 것까지 신경을 써 주었으며 매일 그녀와 수영, 구기운동과 같은 각종 여가활동을 같이 하였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같이 먹으러 다녔다. 그리고 덩리쥔에게 접대가 있는 날이면 항상 그녀를 동반하였다. 덩리쥔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린젠파는 앞에 세 줄을 모두 예약하여 친구들을 청해 그녀를 성원하였다. 이러한 열렬한 구애방법으로 린젠파는 빠르게 덩리쥔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이 갑자기 빠르게 발전하여 결혼 얘기가 오가는 단계까지 왔다고 보도했다.
2년 후인 1973년 일본 폴리돌(Polydor)사와 계약을 맺은 덩리쥔은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으며 린젠파는 싱가포르에서 계속 머무르며 사업을 확장하였다. 두 사람은 비록 계속 연락을 했지만 떨어져 지내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러다 몇 년 후 린젠파가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싱가포르에서 죽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0여 세였다.
일본에서의 유일한 스캔들--모리 신이치
일본 가요계에 있는 기간, 덩리쥔은 노래기교 향상 및 사업계획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에 있는 여러 해 동안 그녀는 일본의 가요계 스타인 모리 신이치와 잠깐의 스캔들이 있었는데 기간도 불과 두서너 달 뿐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헤어졌다고 보도했었다. 모리 신이치의 남성중심사상을 덩리쥔이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특히 그는 그녀가 결혼하면 가요계를 은퇴하여 가정주부만을 하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 오로지 가요계에서 한층 더 발전하여 성과를 올리려던 덩리쥔이었기에 단호하게 정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덩리쥔과 사이가 가장 좋았던 그녀의 동생 덩창시(鄧長禧)는 이런 소문을 뒤집었다. 그는 지금까지 덩리쥔이 일본남자를 좋아한 적이 없었으며 다만 모리 신이치와는 같은 소속사에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덩창시는 또한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가요계에 들어감에 따라 소속사에서 두 사람을 선남선녀의 이미지로 만들 심산으로 모리 신이치를 킹(King)으로, 덩리쥔은 퀸(Queen)으로 자주 두 사람을 같이 묶었다고 말했다. 설령 소문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리 신이치와 덩리쥔의 친분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덩리쥔이 죽었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진 후 일본 방송국에서 모리 신이치를 인터뷰했는데 신이치는 매우 상심한 모습이 역력했으며 “덩리쥔이 42세에 결혼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바람이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게 돼버렸다”며 울먹이며 말했다.
조금은 알쏭달쏭한 스캔들 - 친샹린(秦祥林진상림)
1978년 봄 무렵 영화계에서 덩리쥔과 친샹린이 연애를 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오자 대번에 떠들썩해졌다. 왜냐하면 친샹린이 그때 막 이혼을 한 상태였고, 더 중요한 것은 당시 그가 영화계 스타인 린칭샤를 쫓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8년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친샹린은 부인이자 역시 같은 영화배우인 샤오팡팡(蕭芳芳)과 성격상의 이유로 이혼수속을 마쳤다. 같은 해 3월, 타이완 언론에서 한 영화 팬이 로마에서 친샹린과 덩리쥔이 손을 잡고 '로마의 휴일'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으며 이 팬은 둘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지만 친샹린이 정중히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처음 친샹린과 덩리쥔은 둘 사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계속 추궁하자 덩리쥔은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린칭샤 때문이라며 못 믿겠으면 린칭샤가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친샹린은 일찍이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전에는 그는 여자친구의 뜻을 존중해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밝혀었다. 그러나 친샹린은 덩리쥔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고 친구에게 자주 “덩리쥔이 내게 너무 잘해줘”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름이 지난 뒤 친샹린은 마침내 그녀와의 연애사실을 공개하며 “처음엔 내가 덩리쥔을 쫓아다녔다”고 말했다. 친샹린은 덩리쥔의 순진함과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고 처세하는데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처음에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친샹린은 덩리쥔이 개인 프라이버시가 화젯거리로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덩리쥔이 싫어할까봐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31일 일본에서 장기간 활동하고 있던 덩리쥔이 타이완에 가족들을 보러 두 주간 타이완에 머물게 되자 매체들이 당연히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공항에서 그녀에게 열애 중인지를 추궁했다. 그러자 그녀는 질문을 회피하며 함구하였다.
덩리쥔의 친한 친구인 장위링(張玉玲)도 덩리쥔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심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덩리쥔은 “아마 친샹린과 나만이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고 말했다. 당사자가 이렇게 한결같이 부정하자 장위링은 덩리쥔의 말을 믿었고 덩리쥔이 타이완에 있는 기간 동안 그녀를 위해 소개팅까지 주선하였다. 그러나 자리에 나온 남자도 덩리쥔을 보자 역시 “친샹린과 사귀는 것이 아니었나요?”라고 물었다. 타이완에서의 바쁜 나날 속에서 덩리쥔은 “정말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요!”라며 담담하게 자신의 바람을 말했는데 마치 그녀와 친샹린의 인연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던 친샹린과 덩리쥔의 알쏭달쏭한 관계는 반년 만에 끝이 났으며 일여 년 뒤 친샹린은 린칭샤와 결혼했다.
타국에서의 만남- 청룽(成龍:성룡)
1979년 말, 덩리쥔은 인생에서 가장 저조한 시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놔두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청룽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배틀 크리크>를 찍고 있었다.
어느 주말, 촬영이 없는 틈을 타 청룽은 해변의 인도(人道)에서 롤러스케이트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길 가에 군것질을 파는 상점에 왔을 때 그의 몸은 연신 음악에 따라 흔들어댔고 장난스런 그의 몸짓에 옆에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자 문득 청룽은 약간 멋쩍은 생각이 들어 급히 스케이트 바퀴를 세웠지만 그의 몸이 앞으로 몰리면서 하마터면 한 여성과 부딪힐 뻔 했다. 그는 재빨리 그 여성에게 “sorry”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성이 중국어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익숙한 중국어를 듣자 당시 영어에 서툴렀던 청룽은 매우 놀라 친근한 마음에 자세히 그 여성을 훑어보았는데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가 영락없이 아시아계였으며 게다가 얼굴도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크게 이름을 떨치던 덩리쥔이었다! 청룽은 덩리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약간 긴장한 덩리쥔이 급히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그에게 작게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이리저리 둘러보고 주위 사람이 알아채지 못한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였다.
“이곳에서 중국인을 보니 정말 좋군요.” 덩리쥔이 청룽에게 말했다. 청룽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후 그녀와 함께 자주 저녁을 먹거나 춤을 췄다. 그밖에도 청룽은 덩리쥔에게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주었고 덩리쥔은 음악에 관심이 큰 청룽이 성악과목을 들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청룽이 샌안토니오에서 영화를 찍게 되어 떠나게 되자 두 사람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남성중심 성향이 강했던 청룽은 덩리쥔에 대한 감정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그러다 떠나기 하루 전 호텔 객실에서 헤어질 무렵 덩리쥔이 가볍게 작별키스를 하자 청룽은 매우 기뻐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우정을 넘어 연인관계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몇 주일이 지나 미국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고 있던 청룽은 촬영이 없는 날이면 덩리쥔과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가운데 점차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하루는 덩리쥔이 전화로 청룽에게 그를 보러오겠다고 말했다. 그때 청룽의 친구들이 법석을 떨며 큰형의 여자친구에게 전화 왔다며 큰형이 여자친구와 보낼 거라고 수군거렸다. 남성중심적인 생각이 강했던 청룽은 순간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느껴 호기를 부린다고 덩리쥔에게 “오고 싶으면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덩리쥔이 와서 그에게 물었다.
“새로 오픈한 프랑스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러자 청룽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항상 그런 곳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하는데 난 메뉴판에 뭐라고 써 있는지 몰라서 주문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뭐가 화이트 와인이고 레드 와인인지도 모르겠어.”
낭만적인 데이트를 한껏 기대하고 있던 덩리쥔은 차가운 청룽의 반응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 덩리쥔의 상심한 모습을 본 청룽은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누그러져 말했다.
“좋아, 그럼 친구들과 같이 가자.”
하지만 청룽의 이 말은 덩리쥔을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큰 소리를 잘 내지 않던 덩리쥔은 화가 나서 목소리 톤을 높여 청룽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친구들을 부르자고.”
“둘만 가요.”
“무슨 소리야. 걔들이 안 가면 나도 안 가.”
덩리쥔은 슬퍼하며 그에게 물었다.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밤인데 정말 둘만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밥을 먹고 나서 둘만 있을 수 있잖아. 밥 먹는데 왜 꼭 둘이서만 있어야 하지?”
청룽의 태도를 본 덩리쥔은 마음이 상해 청룽을 향해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 덩리쥔은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겠다면 난 가겠어요.”
당시 젊은데다 큰 형님 행세를 하기 좋아했던 청룽은 덩리쥔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잘 가” 청룽은 쿨하게 덩리쥔에게 말했다. 덩리쥔은 화가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청룽은 약간 후회가 되어 작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덩리쥔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청룽은 조금 다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체면을 구길 수 없어서 냉담한 척 하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본 채 그녀가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친구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뒤 내내 덩리쥔이 마음에 걸렸던 청룽은 얼른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을 구했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덩리쥔은 청룽에게 말했다.
“당신이 아쉬울게 뭐가 있겠어요? 친구들이 있으니 내가 필요 없게 된 거잖아요. 나도 당신이 필요 없으니 당신 친구들과 평생 같이 사세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덩리쥔은 청룽을 용서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 - 궈쿵청(郭孔承:곽공승)
1981년은 덩리쥔에게 새옹지마같은 한 해였다. 일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이리저리 떠돌던 마음도 그 해에는 기댈 곳이 생겼다.
궈쿵청과 만나게 된 것은 청룽과 결별한 뒤인 1980년 말경이었다. 궈쿵청은 덩리쥔보다 7살 많았는데 수염을 길렀으며 매우 개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말레이시아재벌”이라고 불렀지만 덩리쥔은 이런 칭호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아 “그의 아버지는 모(某) 그룹의 주주이고 그는 그 그룹에 다닐 뿐이지 무슨 재벌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궈씨 집안이 동남아시아 화교 중에서 손꼽힐 만큼 부자였으며 덩리쥔이 말한 “모 그룹”이라는 것은 사실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샹그리라(SHANGRI-LA)'였다. 당시 궈허녠(郭鶴年:곽학년)이 그룹 회장을 맡고 있었고 궈쿵청은 그룹 이사장이자 샹그리라 호텔 상무를 맡고 있었으니 명문가의 자제라고 할 수 있었다.
궈쿵청과의 만남은 여러 번 언론에서 공개됐듯이 허리리(何俐俐)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1980년10월 덩리쥔이 홍콩에서 단독 콘서트를 했을 때 허리리가 사람을 몇몇 청해 같이 밥을 먹었는데 원래는 시계업계 젊은 사업가인 판띠첸(潘迪臣)을 덩리쥔에게 소개할 심산으로 자리를 마련한터라 판띠첸과 그녀의 숙부 중간자리에 덩리쥔을 앉게 했다.
그러나 젊은 사업가 판띠첸은 덩리쥔이 좋아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녀를 좋아한다고 내비치고 일에서는 또한 능력이 있었던 궈쿵청이 덩리쥔에게 “젊은 사업가는 곧 나약한 부잣집 도련님”이란 편견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궈쿵청과 덩리쥔의 관계는 빠르게 발전하여 1981년 10월28일 저녁에 비공개로 약혼하였다. 약혼식은 아주 조촐했는데 양가 가족들 외에 제일 친한 친구 몇몇 만이 참석했다. 궈씨 집안과 덩씨 집안은 서로 증서를 교환하고 날을 잡아 혼사를 치르기로 했다.
약혼식은 비공개로 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기뻐서 입이 귀까지 걸린 궈쿵청의 실수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약혼식 이튿날 즐거움에 들뜬 궈쿵청이 선뜻 일천 홍콩달러를 비서에게 주며 약혼식 과자 대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약혼 사실이 새어나와 점점 퍼지게 된 것이었다.
덩리쥔의 부친 건강이 좋지 않은 이유로 해서 1982년1월20일, 덩리쥔은 급히 싱가포르에서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에 관한 매체의 질문에 그녀는 부정했지만 궈쿵청과 사귄다는 사실만은 직접 밝혔다. 그녀는 기자에게 말했다. “그와 알게 된지 겨우 반년일 뿐이고, 결혼같이 중대한 일을 그렇게 급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서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열애에 대해서 항상 함구해오던 그녀가 공개적으로 두 사람의 일을 밝힌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결혼에 대한 질문에 덩리쥔의 말 속에는 기대와 함께 혹시 있을지 모른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그가 결혼까지 고려하는 대상이라는 것만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계속 관계를 이어갈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가 내게 준 느낌이 다른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30년 동안 이미 가요계에서 10여 년을 보내온 덩리쥔은 좋은 사람을 찾아 안정적이고 보통사람처럼 가정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도 예비사위를 매우 흡족해하여 딸이 궈쿵청에게 시집가는 것을 적극 찬성하였다. 더구나 궈쿵청의 모친이 암을 앓고 있어 빠른 시일 내에 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자주 덩리쥔과 궈쿵청에게 결혼을 재촉하였다.
모든 것이 마치 물 흐르듯 순조롭게 이뤄지려는 찰나 작은 변화가 생겼다. 궈씨 집안의 실질적인 사업기둥을 잡고 있던 조모가 조건을 내걸은 것이다.
일의 발단은 덩리쥔과 궈쿵청이 연애하는 기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지 얼마 뒤 궈쿵청이 덩리쥔을 데리고 부모님을 뵈었다. 그런데 일약 가요계 스타였던 덩리쥔이 궈씨 집안에 들어서자 집사, 고용인, 운전수 할 것 없이 흥분하여 덩리쥔을 둘러싸고 사인을 요청했는데 시끌벅적한 것이 마치 팬 미팅을 연 것 같았다. 하지만 궈씨 집안은 상당히 보수적인 집안인데다 궈쿵청의 조모가 연예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조모는 처음 집에 온 덩리쥔의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당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덩리쥔과 궈쿵청이 결혼 날짜를 정할 무렵 덩리쥔이 특별히 싱가포르에서 돌아와 궈씨 집안 어른들과 결혼식에 관한 세세한 것을 의논할 때 뜻밖에 조모가 갑자기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덩리쥔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힐 것, 둘째는 궈씨 집안에 들어온 후 즉시 연예계를 은퇴할 것, 셋째는 연예계 친구와의 왕래를 끊을 것이었다.
덩리쥔은 궈쿵청과의 결혼을 결심한 뒤 일찍이 가족들에게 결혼하면 가요계 은퇴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자주성과 자존심이 매우 강한 여자였다. 할머니의 요구는 그녀의 일을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결국 1982년 말, 덩리쥔은 파혼하기로 결정하고 궈쿵청과 헤어졌다.
마지막 연인- 프랑스인 남자친구 폴
프랑스에 잠시 머물던 덩리쥔은 1990년 그녀의 마지막 연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보다 15살이나 어린 프랑스 사진가 폴이었다.
덩리쥔은 일년에 대략 5개월의 시간을 프랑스에게 보냈다. 그녀의 아파트는 상제리 극장 맞은편에 있었는데 그녀와 폴은 아파트 5층에 방 4개 거실 1개로 되어있는 집에 살았으며 프랑스은행에 공동명의의 통장도 개설하였다.
덩리쥔과 사귈 당시 불과 23,4세였던 폴은 제멋대로의 성격에 조금은 어린애같았지만 덩리쥔은 그를 많이 배려했으며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대부분 그의 뜻을 따랐다. 덩리쥔은 일찍이 친구에게 폴을 선택한 것은 폴이 그녀가 스타라는 것을 몰라서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1995년2월, 언제나 다름없이 타이완에 돌아와 새해를 보내게 된 덩리쥔은 감기가 낫지 않아 기관지염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타이완에서 보낸 덩리쥔은 ‘은퇴’의 뜻을 알렸다.
그리고 타이완을 떠날 때 타이완 영화계 친구들이 비행기 일등석에서 우연히 덩리쥔과 폴을 만나게 됐다. 당시 덩리쥔은 친구들에게 폴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친구’라고 소개했다. 비행기에서 폴은 덩리쥔에게 매우 잘 대했다. 한번은 덩리쥔이 화장실에 가서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폴은 안절부절 못하며 바로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프랑스어로 “무슨일이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덩리쥔이 문을 열고 작은 소리로 역시 프랑스어로 얘기를 한 후 돌아와서는 친구에게 “머리를 땋는다고 좀 늦었는데 폴은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다니까”라고 말했다. 나중에 폴이 자신이 먹고 남기 포도주 반 잔을 그녀에게 따라주자 덩리쥔은 그의 볼을 어루만졌는데 행동해하는 것을 그녀의 작은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경제력과 나이 등의 문제 때문인지 그녀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 그에게 결혼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